농촌여성들에게 보내는 갈채

최 동 철(전 언론인, 산외면 장갑리)

2001-05-26     보은신문
갓 50대인 속리산 윤순이 아줌마는 매일 새벽 가족을 위한 아침식사를 준비한 뒤 낫과 괭이, 도시락 등 배낭을 챙겨 영동군 국유림지역으로 향합니다.  인근에 사는 종길이 엄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교통비 포함 하루 3만2천원을 벌어 생활비로 사용하기 위해 잡목을 베기도 하고 칡뿌리를 캐내기도 합니다. 물론 손바닥에는 물집이 잡혀 굳은 살이 생겼고 가시덤불에 긁힌 다리 등은 상처투성이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공공근로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국민의 정부'에 감사해 했고 이런 사업이 보다 오래 지속되길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힘든 노동으로 인해 지쳐버린 자신의 몸뚱아리야 어찌될 것인지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 듯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국 여성들. 특히 농촌지역 어머니들은 가정과 자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노동을 하며 생활을 꾸려왔고 또 꾸려가고 있습니다.

농촌여성들의 이 같은 헌신적 부지런함과 자녀교육열은 결국 지금의 한국이 건설될 수 있었던 근간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농촌여성들의 본격적 노동은 사실상 일제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일제시대 조선인 남자들은 징용 당하거나 유학 혹은 독립운동을 위해 농촌을 떠났습니다. 생계 수단을 위해 일본과 만주 등지로 정처 없이 떠돌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당시 사회적 경제적 무능력자였던 농촌 여성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남자가 부재한 상황에서 가정 살림과 자녀를 위해 이전보다 한층 강한 맹렬 여성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일제는 이 점에 착안했습니다. 그들은 한국 농촌여성을 △개인적 경제관념이 강하다 △의지가 강하고 참고 견디는 특질을 가졌다 △형편없는 옷과 음식을 달게 여기며, 근로를 잘 감내한다 △웃어른의 명령을 잘 따르며, 친절하고 의리가 굳다 △감수성이 강하다 등을 장점으로 꼽았습니다. 그리고는 전쟁물자 보급을 위해 농촌여성들을 체제 내에 흡수, 가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농촌여성은 남성노동력을 대신하여 농산물 생산뿐만 아니라 가사 일체, 그리고 농외 작업에까지 동원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오죽했으면 가중된 노동으로 ‘허리가 끊어져오고 다리가 꿀물이 내리도록 수걱수걱 하면서도 삼사월 기나긴 해나 동지섣달 긴긴밤을 하루도 쉴새없이 손발을 놀 리여야 하며, 농번기인 ‘삼사월부터 구시월까지 하루도 쉴새없이 안팎일을 다 맡아보아야' 하고, ‘촌사람 같이 서러운 것이 어디 있담! 제일 나쁜 것 입고 제일 나쁜 것 먹고 쓰고 제일 고달프게 일하고 제일 추하게 거처하고' 라는 말로 표현될 정도였겠습니까.

어찌됐든 농촌여성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하는 의지와, 자녀를 위해서는 물불을 마다하지 않고 천성적인 모성을 발휘하는 이른바 ‘억센 여성'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여식이나 며느리들 또한 오늘의 피폐된 농촌을 지키며 헌신적 노동으로 가정경제를 꾸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정도나마 우리 농촌이 지탱될 수 있는 건 분명 존경스런 그들 덕일 것입니다.그래서 농촌 여성들에게 갈채를 보냅니다.

<정이품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