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과 시인
김 창 규(내북면 법주리)『시인, 목사 5·18 민주화운동관련자, 민예총회원』
2001-05-19 보은신문
광주 망월동에 가면 그 때 죽은 사람들의 무덤이 있고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이 떠돌고 있다. 나는 이 오월이면 먼저 죽은 민족시인들을 생각한다. 김남주 시인과 조태일 시인 그리고 우리 보은 지역이 낳은 유명한 시인 오장환 시인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네 권의 시집을 냈는데 성벽(城壁), 헌사(獻嗣), 병든 서울, 나사는 곳, 이렇게 4권의 시집이 있는데 그 중에 1946년에 발행된 〈병든 서울〉이라는 세 번째 시집을 말하려고 한다.
1980년 이 시집을 군산고등학교에 5명의 교사들이 돌아가면서 읽었고 이 들은 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나면 소나무 밑에서 대화를 나누고 하는 사이였는데 〈병든 서울〉이라는 시집을 읽었다고 하여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었다가 5년을 넘게 살고 나온 이광웅 시인을 생각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오송회(五松會)사건이다.
그는 감옥에서 나와서 전교조 활동을 하다 병으로 죽었다. 오장환 그가 쓴 〈병든 서울〉은 오늘 이 나라 현실을 50년 전에 이미 말하고 있었다. 오장환 시인은(1916년 - 1947년) 회북면 중앙리(과거 회인)에서 5월 15일 태어났다. 그가 말하는 〈병든 서울〉은 암흑과 같은 독재시절에 금서였다. 읽으면 반공법으로 저촉이 되는 그런 책이었다.
이제는 금서조치가 해제되어서 우리가 읽을 수 있게 되었지만 과거 1980년 당시만 해도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오장환 시인을 닮아서인가 민중시를 썼고, 1980년 광주에서 당시 발표된 김준태 시인의 시 ‘아!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여!’ 라는 시를 읽고 이 시를 타이핑하여 등사판에 등사를 하였다. 그리고 청주지역에 뿌렸다.
요즘같이 복사기가 흔한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수백 장을 등사하는데 밤새 걸렸다. 당시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이것을 대학생들에게도 주었고 시민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이 일로 해서 나는 제 3관구 계엄사령부로 연행되어 대전교도소에서 형을 살았다. 참으로 혹독한 고문과 독방생활을 생각하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이후로 1990년 윤석양 이병의 보안사찰 기록에서 발견되어 보은 사람으로 일간신문에 보은군 내북면 김창규라는 이름이 크게 실렸다. 나는 목사였기 때문에 큰 피해는 없었지만 교회가 큰 상처를 입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은 이런 사건으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보은사람으로서 불이익을 당하면서 오늘날까지 살아오다 얼마전에 5.18민주화운동 보상법으로 다소나마 명예가 회복되기도 하였다. 나는 오월이면 보은 오장환 문학제를 기억하고 오장환 생가에 생가터 표지석을 세운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나의 조상들은 보은 종곡리와 북실, 법주리에 경주 김씨 版圖判書公 壯菴派 10대∼20대까지의 선조가 묻혀있고 동학을 했던 할아버지가 자랑스럽기도 했다.
이제 보은에는 나 같이 불행한 시인은 오장환 시인으로 끝나길 바라지만 나는 아직도 보안관찰대상자가 아닌가 의구심이 가고 그러면서 오월을 보내며 아물지 않은 광주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남민전 사건으로 9년의 옥살이를 했던 광주 사람, 김남주 시인이 영동 박운식 시인의 집에서 우리지역 시인들과 하루를 지냈다.
그 후 1994년 1년 만에 옥중에서 얻은 병으로 죽었지만 그때 그는 오장환 시인이 있는 충북 보은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오월의 시인 오장환 그는 어쩌면 이와같은 인연으로 부활하는 산하에 그 이름 석자 영원히 기억 하리라.
<정이품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