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면 신정리 박준례씨
자랑스런 죽음과 삶, 고난 극복한 六·二五 전쟁 미망인
1993-06-05 보은신문
험한 세상을 여자 혼자 몸으로 헤쳐와 지금은 억센 손, 거친 얼굴로 주름 투성이의 모습이지만 꿋꿋하게 남편의 명예를 살리며 바르게 살아, 비록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생화은 아니더라도 남부럽지 않을 정도의 행복을 영위하고 있다. 산외면 신정리에서 나고 자란 박준례 할머니는 19살 되던 해에 5형제 중 맏이인 20살 황구현씨에게 시집을 갔다. 막내 시동생이 5살박이였을 정도로 시동생들의 나이가 어렸고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으며 소나무 껍질을 벗겨먹고 콩물에 쑥을 뜯어 죽을 끊여먹으면 잘먹은 축에 들 정도로 궁핍한 살림이었지만 아들을 낳아 애지중지하게 기르면 단란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아들 선용이 3살 되던 해 6.25전쟁이 터져 남편 황구현씨가 전쟁터로 떠났고, 무사히 살아오기만 기다리던 가족들에게 이듬해인 '51년 2월 16일 난데없는 전사통지서가 날아들었다.
강원도 금화지구에서 남편이 전사했다는 소식에 하늘이 노랗고 앞길이 막막했으나 시부모님이 실신할 정도여서 자신은 차마 슬픈 내색조차 어려웠다고 한다. 맏며느리였던 박준례씨는 거동이 불편한 시아버지, 병환중인 시어머니, 줄줄이 딸린 시동생,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보살펴야 하고, 집안을 이끌어어 했다. 때문에 농사짓는 틈틈이 남의 집 품팔이며, 산약초를 캐거나 떡을 해서 팔기도 했고, 사과장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 시동생들을 교육시켰으며, 집안사정상 셋째와 넷째집 조카들도 자신이 데려다 키워야 했으나 워낙 잘따르는 조카들 때문에 즐거웠다고.
그러나 가난 속에서 행복을 느낀 것도 잠시…국민학교에 다니던 아들 선용이 8살 때 팔과 다리가 골수염에 걸려 행동이 불편해지자 박씨는 아들을 업어서 등하교시켰고, 완쾌시켜야 겠다는 일념으로 병구완에 힘써 차츰 차도를 보였다. 그 아들이 병치레를 하면서도 보은중학교와 청주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지금은 충북투자금융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사회인으로 일하고 있어 더할 수 없이 기쁘다는 박준례 할머니. 이제는 논 1천5백평, 밭 1천평 가량으로 살림도 불렸고 시동생들이며 조카들도 잘 자라 재벌 부럽지 않다는 박준례 할머니는 아들이 농사는 남에게 맡기고 편히 지내라고 하지만,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일을 하고 싶다고. 6원이 되면 더욱 남편이 그립다는 박준례 할머니는 90세된 시어머니와 함께 오늘도 먼저간 남편이 저세상에서라도 잘 살기를 빌어본다.
<금주에 만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