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 보은취회 1백주년을 맞아<6>

동학 유적지의 정비와 복원

1993-04-24     보은신문
한국 근대사상 보은이 격변하는 정세의 중심 무대로 떠올랐던 것은 동학과 관련한 1893년에서 1895년(양력)에 걸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서이다. 장안 마을의 동학집회에서 제기된 보국안민과 척양척왜는 시급했던 그 시대의 지상과제를 집약해서 표현한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수의 동학교도들이 집결해 강력하게 요구한 이 과제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지 못했고 그 까닭에 결국 나라가 망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20일간 장내리에서 펼쳐진 평화적 시위는 근대적 무저항 시위의 효시가 되었으며, 이 취회를 통하여 민회라는 당당한 주장이 조선조 정치체제 아래에서 처음 나왔다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다음해 동학혁명의 기폭제가 되었고 민주화 운동의 시발전이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이 시대를 살고 다음 시대를 살아갈 사람들을 위해 앞날의 교훈으로 삼을 수 있도록 군내의 두 곳에 기념비를 세워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

먼저 어느 때든지 현재의 난국을 헤쳐나갈 비상(飛上)의 뜻으로 장안마을의 돌성터에 '輔國安民'의 의미를 새기는 표석을 세워야 하며, 동학교도 집결의 중심적인 위치였던 성터 내부나, 보은-상주간 국도변의 장내1구 뒤쪽, 그리고 뒷산(옥녀봉)과 앞산을 잇는 대각의 꼭지점에 해당하는 곳에 상징탑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동학집회지의 범위는 현 외속리면 장내리 전역과 그 주변도 포함된다. 도회소였던 큰 기와집은 지금은 없었지만 성을 쌓았던 장내1구 뒤쪽 김기태씨 소유의 논에 그남벽으로 여겨지는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에 있었던 성의 규모는 길이와 너비가 1백여보라 한 것으로 보아 길이 1백80미터 전후, 높이와 반장이 1/2 10자로 1.51∼1.6m 정도로 추측된다. 현재 논죽이자 농로로 이용되는 성벽의 규모가 이와같아 복원이 가능하지만, 주변이 절대농지로 묶여있어 복원시 다시 고증이 필요하며 복원에 앞서 이곳의 대지를 구입, 현 도로와 성터 사이에 일정한 넓이의 땅을 확보하여 어려움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음 보은읍 종곡리와 성족리 사이 낮은 계곡의 농민군 매장지에는 안내문을 설치, 위령탑을 세우고 주변을 잔디공원으로 조성하며 농로를 개수하여 방문객의 편의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한편 천도교 중앙총부(교령 오익제)의 동학혁명 1백주년 기념사업회(회장 김현국)에서는 오는 25일 보은취회 1백주년 기념 행사를 갖는다.

전국의 천도교인과 주민 등 예상인원 3천여명이 모인 가운데 동학 보은취회 1백주년을 기념하는 기념식과 아울러 43명으로 구성된 천도교 서울교구의 풍물 놀이패가 분위기를 고조시킬 계획이다. 이 행사는 동학 보은취회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최초의 대규모 기념행사가 될 전망이어서 기대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또, 이미 최시형의 동상을 제작완료하고 내년에 이를 세우기위한 부지와, 동학군 총지휘본부 사무실로 알려진 도소의 복원에 필요한 3백평 규모의 부지를 마련할 수 있도록 군에 협조를 요청해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군은 동학교도 집결지에 대한 사적공원 조성사업 구체화를 위해 용역을 의뢰중에 있으며, 예산 형편상 부지매입에 이뤄지기까지는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