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 보은취회 1백주년을 맞아 <4>

근대적 무저항 시위의 효시

1993-04-17     보은신문
동학사에 있어서 보은취회가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최시형이 보은 장내리에 지휘 본부인 대도소를 설치, 50여개의 포명(包名)을 정하고 대접주를 임명하였는데 이때 백범 김구 선생도 팔봉접주로 임명받았으며 고주접주 전봉준 장군은 운량책임자로 참가하였다.

각지의 동학교도 2만7천여명이 모여 20일간에 걸쳐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라는 글씨를 크게 써 깃발을 세웠는데 외국과 일본으 배척한 다는, 즉 대내외에 척왜척양을 기치로 내세운 것은 민중의 공격목표를 종교자유 쟁취로부터 정치문제로 승화시킨 보은취회의 가장 큰 의미라 볼 수 있다.

종교적 표방을 완전히 정치적 표방으로 바꾼 보은 장내리 취회는 당시 농민학도의 의욕을 충족시킬 수 있어서 자발적인 많은 참여를 낳게 하였고 탄압권력에 대한 정치적 대결로의 투지가 더욱 높았던 것인데, 교주 최시형을 둘러싼 동학상층부 지도층의 은인자증적이고 무저항 적인 타협에 의해 결과적으로 보은집회는 공전되고 말았다. 이것은 정치적 대결로의 투지에 불타고있는 동학도들에게 새로운 지도자 요청이라는 여건성숙 아래 신앙연륜이 어리고 참신한 동학의 하층간부인 호남접의 접주들이 나타나게 되었고 드디어 갑오농민전쟁으로 발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동학 2차 집결지인 장내취회를 지켜본 보은군민들은 교도들의 시위를 보면서 큰 자극과 나라의 위기를 느꼈고 나라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들이 몸소 체험하고 있던 부패관료들의 형태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이후 전봉준의 봉기로 시작된 민란에 함께 참여하는 계기가 됨과 아울러 동학교도들과 불만에 차있던 농민들이 장내리에 모이는 등 장내리는 봉기의 중요 본거지가 되기에 이른다.

이것은 이들이 전봉준 부대 등 과 합세하기 위해 장내리를 떠난 후 이곳을 순찰한 관군측이 중앙에 보낸 보고서에서 "동학군이 머물던 초막이 4백여개이고 그 근처에는 민가 수백채가 있으나 모두 텅비었다"고 밝히고 있어 보은의 민중이 적극적으로 보국안민을 기치로 동학의거에 참여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또한 동학군이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관군에 의해 타격을 받고 뿔뿔이 흩어진 뒤에도 보은 민중에 의해 동학을 앞세운 저항이 계속 되었음을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같은 기록에 따라 동학이 보은민중에게 끼친 영향은 대단했으며 학계에서도 장내리를 동학의 변천사에 있어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또한 <천도교 창간사> 제2권 55쪽에서 <각 포에는 포기를 세우고 도인들은 일정한 대오를 정하여 막하에 있게 하되 출입에 심고를 하고 무시로 주문을 외우며 때론 교리를 강론하였는데 만인의 행동이 한 사람과 같이 조금도 문란함이 없었다.

특히 청결을 위주로 하여 침이나 코를 아무데나 뱉지 아니하며 모든 배설물은 땅에 묻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또한 의관을 정제하고 행동을 엄숙히 하며 상인의 음식값은 한푼도 틀림없이 각자 스스로 계산하여 조금도 어긋남이 없게 하였으므로 보는 사람마다 모두 덕풍을 칭찬해 마지않았고 도를 비방하는 사람들까지도 '동학도 이기는 해도 행위는 바르다'는 말이 원근에 자자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보아 보은 취회가 새사회의 모습을 구가하는 희망에 넘친 집회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은 보은취회는 근대적 무저항 시위운동의 효시가 되었으며 이 취회를 통하여 민회(民會)라는 당당한 주장이 조선조 정치체제 하에서 처음 나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평화적이고 도덕적인 질서로 이루어진 보은취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화운동의 시발점으로서 동학혁명의 물꼬를 터놓았고 3·1 독립운동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시점에서 천도교 중앙총부가 오는 25일 속리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개최하는 보은취회 1백주년 기념식은,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발전시키고 보은취회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사회적 인식을 높여 민족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것으로 가름해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