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 1백주년을 맞아<3>
1893년 보은집회와 왜·양의 배척
1993-04-03 보은신문
보은의 장안마을은 아때부터 각처의 교인들에게 동학교단의 본부를 알려지게 되었다. 3월 들어서까지 지방 관아의 탄압이 계속되자 3월10일 교주 최시형은 다수의 동학교도를 한지역에 모이도록 하여 압력을 넣기도 하고 보은의 장안 마을을 집회장소로 정했다. 보은집회의 일차 통유문(3월11일자)이 교조 신원과 사회개혁을 위주로 하여 작성되었고, 이차로 나온 통유문(3월16일자)은 척양척왜(斥洋斥倭)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위조로 작성되어 일제히 전국으로 동학조직에 전달되었다.
즉 종교운동으로 시작한 동학이 보은집회에서부터 개혁을 위한 사회운동으로 한 단계 발전해간 것이다. 동학의 제2게 교주 최시형이 보은의 장안마을에 도착한 날은 청산에서 교조 제례를 마친 다음 날인 음력 3월11일이었는데 각처에서 몰려온 수만명의 동학교도들과 교단의 지도부가 모여 교주와 함께 주요 방침을 논의했다. 3월11일 보은관아의 삼문밖에 붙인 격문에서 내세원진 보국안민과 척양척왜의 구호는 지방관아에서 볼 때 큰 충격이었고 관변 측이 이에 대처, 집회의 모습을 탐지해 왕조정부 실상을 보고 한 취어(聚語)를 통해, 당시 보은집회의 상황을 알 수 있다.
장안 마을에는 옥녀봉 기슭을 둘러싸듯 집들이 들어차 있었고 그 중 대단히 큰 기와집에 동학교소가 설치되었으며 동학교도들은 각기 긴 장대에 깃발을 만들어 걸고 자갈돌을 모아서 성을 만들었으며 낮에는 하천주변에 모였다가 밤이 되면 부근 마을에 흩어져서 잤다. 그 기와집은 지금은 터남 남아 마을 뒤쪽의 논으로 변했고 그때 쌓은 돌성의 흔적이 지금도 논둑을 이루고 있어 그 형상이 분명히 드러난다.
돌성 안에 모여 공동생활을 한 동학교도들은 노래를 부르고 주문을 외우며 각지에서 모인 교도들을 단결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교인으로서의 수행을 그치지 않았고, 관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군사 편제처럼 움직였다. 모인 동학교도들의 수는 기록마다 다른데 일인당 돈 일푼씩 걷으니 모두 2백30냥이 되었다고 한 것을 보면 적어도 2만 3천명 이상이 모였던 것으로 보인다.
보은 관아와 감영, 그리고 왕조정부에서는 보은 장안 마을에 집결한 동학교도들을 해산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청주병사 홍계훈으로 하여금 보은에 관군을 주둔시키게 하는 한편, 호조참판 어윤중을 양호도 어사 또는 선무사로 임명하여 수습토록 하였다. 여윤중은 동학교도들의 대표와 만나 척양척왜 항목을 중심으로 집회의 의도에 대하여 상세히 청취하였고, 외세를 배척하자는 주장을 고종에게 상달하겠다는 약속아래 해산을 종용하였다. 고동도 윤음을 거듭 내려 해산을 명했고 장위영 군대 6백명이 동학교도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3월30일 청주에 보내졌다.
보국안민과 척양척왜의 주장을 왕조정부는 회유와 군대로 막으려 한 것이다. 동학교단의 지도부는 정면충돌을 피하려면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동학교도들은 4월2일부터 장안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다. 20일간 집결해 있었기 때문에 지쳐있던 동학교도들은 각기 고향을 향해 출발하였고 교수 최시형도 상주방면으로 떠났다. 그러나 장안 마을은 교주가 중시했던 곳이었고 교통이 편하여 삼남의 교도들이 오가기 쉬웠던 까닭에 1894년 또다시 동학의 본부 역할을 하게 된다. 최시형이 청산과 보은 장안을 오가며 각지의 동학교도들과 연락하고 활동을 해나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