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 1백주년을 맞아<2>
동학의 창도와 교세 확대
1993-03-24 보은신문
따라서 쉽게 민중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각 지역으로 확산되어 나갈 수 있었다. 동학의 신앙 대상은 '하늘(天)' '천주(天主)' '한울님'이 었다. 사람은 한울이 인격적 존엄성을 부여한 존재이고 한울을 믿음으로서 한울 앞에 모두가 동등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멀리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몸 가까이에 있는 것이며 스스로 자각해야 되는 문제였다. 이 자각은 비판의식을 가지고 현실 사회를 봄으로써 얻어지는 것이었다.
때문에 당시 사회 체제의 근본 바탕인 신분제는 부정될 수밖에 없었고, 그 부정논리는 신분제의 차별 대우로 인해 고통 받던 농민들 사이에 급속히 전파되었다. 또한 인간 종교의 주술 강령 형태로 포교한 방법과 쉽게 만들어 진 경전도 농민층을 대상으로 포교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동학은 조선국가의 지배층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그 시기 왕조정부의 집권세력은 외세에 대한 배격 문제에는 시각이 같았지만 신분제를 부정하는 주장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많은 도교들이 모여서 무슨 일을 꾀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동학이 커지면 무엇보다 왕조정부의 정면 항거하는 모반을 일으킬지도 몰랐고 그래서 1864년 봄 세상을 현혹시키고 백성을 속인다는 죄목으로 교주 최제우를 붙잡아 처형, 그 뒤 동학은 사교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동학은 이대 교주 최시형의 활동에 의하여 다시 교세를 확대 시켰다. 최시형은 왕조정부에 의하여 동학도교들이 호되게 탄압 받을 때 태백산으로 피신해 화를 모면하였고 그 뒤 최시형은 소백산맥 양편 지역의 험준한 산골 마을을 거점으로 은밀히 퍼져나갔다.
이 시기에 동학이 퍼져나간 지역은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울진, 정선, 영월, 보은, 괴산, 단양, 충주, 상주, 금산, 문경, 예천, 안동, 순흥 등지였다. 모두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골짜기를 끼고있는 지역으로써 유사시 험한 산길을 동행 피신하기 적합한 지역이었다. 교도들이 많아지고 교세가 퍼지면서 최시형은 중요한 설법을 행하고 경전을 간행하는 등 교단 조직을 정비하기 시작했고, 1876년 병자수호조약 이래 구미열강과 국교를 확대한 이후 더욱 교세를 확대시켜 나갔다.
즉, 민족 종교인 동학에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입도 하거나 커다란 조직으로 커진 동학을 이용하여 사회 활동을 하려는 계층 등 많은 인물들이 동학에 입도 하게 된 것이다. 교세는 종전과 다리 삼남 일대에 널리 퍼졌지만 사교로 간주한 지방관아의 탄압은 마찬가지였고 오히려 각 군 현에서 한 층 거세게 동학교도들을 추적, 박해를 하므로써 사회 불안을 조정하는 큰 요인이 되었다.
때문에 동학의 교세가 증대되자 왕조정부에 요구하여 포교를 공인 받자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였고,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신원운동이 시작되었으며 창도이래 처음 시도된 대규모 삼례집회에서 교조의 신원을 강력히 요구한 호소문을 썼지만 성공치 못하고, 국왕에게 호소하는 복합상소를 추진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