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 1백주년을 맞아<1>

반봉건·반외세의 중심무대 "보은"

1993-03-20     보은신문
오는 4월27일은 1894년에 벌어진 동학혁명운동 1백주년이 되는 날이다. 동학혁명운동 1백주년을 앞두고 오는 4월 25일 동학군 집결지였던 외속리면 장내리 속리국민학교에서 천도교 중앙총부(교령 오익제) 주관으로 기념행사를 열 계획인데다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장내리에 2천여평의 부지를 매입, 동학 2세교조 최시형 선생의 동상과 보은동학운동 기념비를 세우는 등 이 일대에 대한 성역화 사업을 추진키로 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또한 군은 동학교도 집결지인 장내리의 흔적만 남아있는 성을 복원하고 정부인 소나무 주변 등을 공원화 하거나 상징탑을 건립하는 등 내년에 추진될 계획을 충북대 호서문화연구소에 용역을 의뢰해 군내의 성역화사업에도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이에 동학혁명운동 1백주년을 맞아 한국의 전근대사회에서는 근대사회로 전환해 가던 시기의 역사적 위치에 있는 외속리면 장내리 보은동학집회를 재조명하고 성역화사업 및 1백주기 행사 등을 7회에 걸쳐 연재, 군민의 적극적인 관심을 유도코자 한다. 1893년 봄 수많은 동학교들이 외속리면 장내리에 모여 대규모 교조 신원운동을 벌임으로써 보은은 19세기말 급박하게 전개되던 조선왕조의 정치활동에서 한 시기동안 중심무대로 등장하였다.

이 시위운동이 단순한 종교 집회의 차원에서 머물지 않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의 국내외 상황과 맞물리면서 그 시대의 시급한 과제였던 반봉건(反封建) 반외세(反外勢)의 민족자존적 움직임으로 확대되어 나갔던 것이다. 1894년에 들어와서도 동학교 단의 지도부가 위치하고 있어 보은일대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호남지역의 남접 농민군이 동학조직을 이용하여 대대적인 무장봉기에 나섰을 때 교단의 지도부는 보은을 거점으로 대규모의 북접 농민군을 조직, 청산, 황간, 영동 등지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북접 농민군은 사회개혁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나 점차 종교운동에서 변혁운동으로 그 노선을 전환시켜 나갔다. 그래서 당면한 민족 최대의 과제인 일본제국주의 등 외세 축출과 민생안정을 위한 활동의 전면에 교단이 나서게 된 것이다. 마침내 교단의 결정에 다라 북접 농민군과 합류하기 위해 논산을 향해 출진 하였다. 그리고 남·북접 연합 농민군은 공주공방전을 벌이게 되지만 일본군의 강력한 화력을 이기지 못하여 패산되고 말았다. 보은으로 돌아온 북접 농민군은 북실마을에서 추격해온 일본군에 대항하여 최후의 전투를 치루고 참담한 종말을 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