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밭에 쑥
모처럼 친구들과 수다스럽게 떠들며 성안길을 걷다가 저만치서 다가오는 한 여인에 시선이 꽂힌 나는 발걸음마저 멈췄다. 세련된 우아함이랄까 우아한 세련미랄까. 그야말로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다. 억지로 꾸미지 않은 듯 단정하지만 검소하다고만 할 수 없이 고상하다.
“나는 있잖아, 예쁜 얼굴보다 저렇게 풍기는 이미지를 더 높이 평가해. 세련미, 교양미, 건강미를 다 갖춘 저 여인.” 그랬더니 옆에서 친구도 뉘댁 마님인지 참 우아하다면서 얼른 가자고 나를 잡아당긴다. 막 그 여인 옆을 지나는데 목소리도 둬 음은 낮춰서 “언니!” 하면서 왼쪽 팔을 살짝 건드린다. 하지만 생소한 것 같아서 “나요?” 하면서 손으로 나를 가르키니까 “언니 나요 늘미에 살던…”
그는 40여 년 전 이웃 동네 살던 말괄량이에 욕쟁이며 야생마 같던 아가씨다. 시내서 아는 척하면 창피해서 주위 눈치 살피던 아가씨였다. 오늘은 차 한 잔 하자는데 나 이렇게 우아한 여인과 아는 사이야! 자랑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어떻게 된 것이냐고 솔직하게 물었다.
“까마귀가 백로 댁으로 시집가니 흰색은 못 되어도 회색은 되네요.” 한다.
“너야말로 삼밭에 쑥이구나.” 하면서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땅을 기어 옆으로 번지기도 하고 서로 엉기며 자라는 쑥도 올곧게 자라는 삼밭에 심으면 따라서 곧게 자란다는 뜻의 우리나라 속담이다. 그 여인도 장꾼들이 모여 사는 환경에서 선비 댁으로 시집가더니 특별교육을 받지 않았으며 물론 성형도 없었지만 외모는 물론이요 교양이 밴 품위와 사고(思考)까지 딴 사람이 되었다.
“나 옛날에 언니 험담 많이 했어요. 고상한 척 교양 있는 척 한다고요. 심지어는 저렇게 가식으로 살자면 얼마나 피곤할까 했어요. 그때는 언니를 이해 못했거든요. 그때 생각하면 진짜 창피해요.” 계면쩍게 웃으며 말을 잇는다.
“결혼하기 전에 울 남편에게 솔직하게 말 했고 시어머니께 솔직하게 다 말했어요, 말이 여고 졸업이지 제가 무식하고 야생마 같으니까 잘 지도해 주시유.” 그랬더니 알고 있다는 어른들 대답에 만감이 교차하더란다. 문제는 실수를 해도 한마디 잔소리 없이 토닥토닥 등을 다독여주는 시어머니의 미소가 소름 돋을 만큼 가식적으로 보이는데 언니 생각 많이 했어요, 속 시원하게 한바탕 야단치면 좋겠는데 며느리 존재를 대놓고 포기한 줄 알고 섭섭하기도 했단다.
그런데 몸과 마음이 다듬어지고 길들이는데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환경이라는 걸 깨닫기 시작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익숙해지더란다. 가족들의 차분한 움직임과 조곤조곤 소통하는 일상에 저절로 닮아가더란다. 한가한 낮 시간에 어머님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찻잔과 책을 들고 거실 소파에 앉으시면 어쩔 수 없이 옆에 앉지만 온 몸이 뒤틀려도 참고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보며 폼만 잡았단다. 처음 1년 정도는 속에 천불났는데 신기하게도 스스로 깨달은 것이다. “언니 가정교육이라는 거 바로 그거였어. 보고 듣고 느끼는 거.” 게다가 밤이면 “오늘도 많이 힘들었지?” 하면서 손을 꼭 잡아주는 남편이 있는데 어떻게 노력을 안 할 수 있느냐고 말하는 내내 나는 참으로 부러웠다. “이 말괄량이 아가씨 어디에 그런 복이 들었을까?” 하면서 빤히 보았다. 거짓 없이 맑은 영혼이다. 자녀들에게 영어, 수학 고액 과외 지도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지만 가정교육 생활환경을 위해서 투자하는 부모는 흔치 않다.
내가 젊은 시절 짧은 기간이지만 아들과 같은 중학생인 집안 조카를 데리고 있었다. 그때 저녁마다 거실에 큰 상을 펴놓고 책을 들고 앉으면 제일 먼저 딸이 옆자리를 차지하고 곧바로 아들이 한방 쓰는 친척과 같이 앞자리에 앉아 숙제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책장은 넘겼다. 조카는 온 몸을 비틀고 긁적거리면서 연신 냉장고 물병이 바빴다. 책상에 앉아있는 것이 힘든 것이다. 모른 척 하며 익숙해지길 기다렸다. 그 결과 정말 놀라운 것은 그 조카의 성적이 한 학기 동안 평균점수가 11점이 올랐다는 것이다. 하위에서 중상위로 올랐으니 부모도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그 조카에게 공부하라는 말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공부해라.” 열 마디 보다 엄마가 먼저 조용히 책 들고 앉으면서 책을 가까이하도록 분위기 조성하는 것은 엄마도 유익하고 자녀들에게 공부뿐 아니라 가족이 보이지 않는 정이 오간다. 돈 들어가는 과외만 집중하지 말고 온 가족이 함께 공부하는 분위기 조성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체험했다. 새해부터 경험하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