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연가
한가위 명절 동안 그리도 기다렸던 달님이 오늘에서야 얼굴을 내미신다. 청명한 가을 하늘에 훤하게 떠오른 달님과 동행하며, 치유의 다리까지 걷는 시간은 나만의 파라다이스다. 우주 저편에서 마법사처럼 달려와 살랑대는 하늬바람과 동행하며, 달빛 아래서 통통 여물어가는 벼 이삭들로 마음을 살찌워 본다. 어릴 적 달빛 눈부시게 쏟아지던 보리밭 속에서, 동무들과 숨바꼭질하던 은적, 은둔의 기억으로 마음도 보름달이 된다. 달, 별자리, 은하수를 바라보며 앞날을 꿈꾸었던 우리네 어린 시절과, 요즘 아이들의 낭만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달빛이 깊어질수록 하늘은 우주의 반만큼 광활해지고, 시월의 밤이 깊어갈수록 북두칠성 등 별자리들은 종적을 감추어 버린다. 다리 아래 커다란 웅덩이에 은분을 한 대야 휘저어 놓으시니, 달빛 저 넘어 피안의 세계가 눈부시게 다가오는 황홀한 밤이 아닌가! 설레임의 조각들이 달빛에 휘날리며 그리움의 물결들이 파도처럼 출렁거린다. 빛과 어둠이 내통하는 황홀경에 내 마음도 안절부절 서쪽으로 달려만 간다.
천지가 이렇게 오랫동안 존재하는 이유도 우주의 행성들이 자신의 궤도를 정확하게 지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이런 자연의 법칙과 질서를 망각하며 사는 듯이 보인다. 초고속 문명 속에서 순하고 둥근 것들은 점점 사라져가고, 옛것은 점점 잊혀져 가는 양상을 부정할 수가 없음이 아닌가! 소프트웨어라 할 수 있는 마음이나 영혼의 가치관이 추락하면서, 정신적인 지주들이 사라지는 위태로움은 슬픔을 넘어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삭막할 정도로 메말라 버린 감성이 지적인 이성에게 억눌리며 오금을 못 펴는 시대에, 우리집 애들부터 간만에 시골 정취에도 빠져 볼만도 하건만, 가족과 함께 바라보는 달빛조차 시큰둥하니 말이다. 나도 저 멀리 무감각의 세계로 내팽개쳐진 영혼을 수습하여, 오랜만에 생의 은하수를 갈망해 보는 달밤이 되었다. 또 사람들은 모두 어디서 무얼 하길래, 이 아름다운 달빛 아래 인적이 종적을 감춘 것일까? 지나가는 사람 하나도 보이지 않으니 문득, 어릴 적 동무들과 고향 마을이 그리워져 시 하나로 달래본다.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이하생략) ~’ 점점 원초적인 순수성과 감성이 실종되어 가는 이 시대에, 달이 떴다고 전화를 해주는 이가 있다는 건 참으로 귀한 인연일 것이다. 진정 살뜰하고 애절하게 그리운 사람이 아니면, 어찌 달이 떴다고 전화기를 들겠는가. 나도 누군가에게 달이 떴다고 전화를 하고 싶을 만큼 충동적인 밤이련만~ 오늘밤 달을 바라보고 있을만한 사람이 쉽게 떠오르지 않자,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라도 들려주려고 휴대폰을 열었다. 어스름 달빛을 타고 퍼지는 소나타의 선율이 기억의 전두엽을 자극하였는지, 평화스럽던 아날로그의 흑백 필름들이 초롱초롱 재생되는 밤이다. 한낮의 소란스러움과 격정에 묻혀 마음의 등불이 꺼졌던 자아가 조망되며, 등불 하나 밝히지 못하고 산 내 생(生)이 훤하게 드러나는 밤이다.
달님이 우울해진 내게 넌지시 가르침의 메시지를 보내신다. ‘미래를 설계하고 예측하라. 너희들의 마음이 밝을 때 태양은 떠오르고, 마음을 닫으면 달빛조차도 쓰러질 것이나니 ~ 모든 것은 적당한 때에 자신에게 다시 돌아오리라. 처음이 나중이 되고 나중이 처음이 되듯이, 있던 것은 지나가고 없던 것은 다시 돌아오리라. 그 누구에게도 기대하지 말고 오직 마음속 본질에 의지하라. 그 누구도 너희를 대신 살아주지는 않을 것이니, 든든한 영혼의 기둥을 세우고 마음의 등불을 밝혀가라!’
내 노래를 들어달라고 전화를 걸 사람은 아직도 생각나지 않건만, 그래도 한가위 달밤을 그냥 접기에는 아쉬움이 한 바구니라 답신을 보내본다.
‘가을의 달밤은 이리도 우주에 충만하고 푸르네. 달빛 깊어가는 밤에 홀로 아름다운 노래 부르네. 한낮의 격정과 함성들 고요히 어둠에 묻히고, 오직 외로운 노랫소리 달빛에 젖어드는 밤이어라. 세월의 터널을 빠져나와 가슴에 파고드는 적요한 달빛! 세상의 어둠을 밝혀주는 달빛의 기도는 영혼의 노래가 되어라. 고요하고 간절한 기도소리 모두의 가슴에 등불이 되어라. 영원히 꺼지지 않는 마음의 등불을 환히 밝혀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