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계단

2025-10-02     양승윤(회남면 산수리)

   아버지는 구순 문턱까지 사시고 떠나셨다. 구순은 졸수(卒壽)나 동리(凍梨) 같은 이명이 있다. 졸수는 일본에서 쓰이는 단어이고, 동리는 우리말로 ‘언 배’라는 뜻이다. 예로부터 배는 노인의 살갗 색깔로 비유되었는데, 나이 구십쯤 되면 얼굴에 반점이나 검버섯이 생겨 마치 언 배 껍질처럼 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별칭이다. 만년의 아버지 얼굴은 동리가 아니었을뿐더러 큰며느리가 저녁상에 올려 드리는 소주잔 반 잔 약술을 드시면 소년처럼 얼굴에 홍조를 띠셨다. 나이 들어 피할 수 없는 주름 이외에는 깨끗한 얼굴이셨다. 일본 유학 때 하숙집 여자 형제들이 잘생긴 조선학생에게 가까이하려고 다퉜다는 얘기가 남아 있고, 금강산 여행 중에 경성의 명문 고녀 졸업반의 일가족과 만났는데, 그 집에서 아직 혼처를 정하지 않았으면, 사주단자를 보내 달라는 기별을 받고 소동이 벌어졌다는 에피소드도 전해 진다.   
   아버지는 석하(夕霞)와 온당(溫堂)이라는 두 호를 가지셨다. 석하는 저녁노을이다. 귀향하시어 붓글씨를 쓰시면서 낙관으로는 석하를, 여타의 편지글 말미에는 온당을 쓰셨다. 나는 아버지의 호 온당이 마음에 와닿는다. 온당. 따듯한 집, 따듯한 방이다. 따뜻한 앉을 자리로도 해석하고 싶다. 사당을 지으신 몇 해 후 아버지는 당신 할아버지와 두 분이 생활하셨던 집도 온당으로 복원하고 싶으셨다. 그래서 틈만 나면 당신의 유일한 대화 창구였던 큰며느리를 채근하셨다. 아버지는 코흘리개 시절에 부모님을 여의셨다. 어머니가 먼저, 새어머니를 모셔온 뒤 오래지 않아서 아버지도. 할아버지는 며느리와 자식이 죽자 동네 한가운데 있던 큰 집을 종친에게 맡기고, 선영 모신 산자락 발치에 세간 크기의 작은 초옥을 짓고 손자만 데리고 칩거(蟄居)하셨다. 자식 떠난 집에서 떨어져 있고 싶으셨다. 
   사당과 새집이 열여덟 개 시멘트 계단으로 연결되었다. 계단은 벽돌 두 장 높이로 낮게 만들어졌다. 아버지는 자주 맨 위쪽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계셨다. 어쩌다가는 어슴푸레 어둠이 깔리는 초저녁까지. 계단을 밝히는 낮은 조도의 주황색 외등을 계단 위쪽 오른편에 세워 드렸다. 당신 맘에 들지 않으셨는지 별말씀이 없으셨다. 아버지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계단을 오르내리셨다. 맘속으로 계단을 하나 둘 세면서 당신 할아버지와 조손(祖孫) 간에 지낸 세월을 거듭거듭 반추하셨다. 아버지는 먹보에 울보에 땡깡쟁이가 분명했다. 나중 어머니는 늘 먹을 것을 장만하여 하루 종일 귀한 종손에게 먹이셨다. 할아버지는 손자 배 터지겠다고 새 며느리를 질책(叱責)하시곤 했다. 당신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거의 없으셨다. 달콤하고 말랑말랑한 대추를 좋아하신 아버지는 시도 때도 없이 대추를 찾으며 생떼를 썼다. 어느 날 당신 아버지는 대추를 한 바가지 퍼다가 자식 앞에 ‘팍’ 쏟아 주셨다. 실컷 먹어봐라, 이놈아. 하셨겠지. 그게 유일한 추억거리였다. 아버지는 늘 할아버지와 나중 어머니를 그리워하셨다. 그래서였을까. 열여덟 계단 숫자를 세고 또 세셨다. ‘열아홉으로 하나가 늘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셨을까. 
   아버지는 큰 자식인 나를 미더워하지 않으셨다. 큰 기대도 없으셨고 그렇다고 해서 결과를 보지 않고 미리 낙담하지도 않으셨다. 그러나 오랜 세월 판단으로는 당신을 빼다 박은 큰 자식을 늘 걱정하셨다. 당신 시대에 벌어졌던 오류를 자식이 되밟지 않을까 조바심하셨다. 종손으로 태어났던 형이 일찍 떠났다. 나는 형을 대신해서 종손 대접을 받았으나, 철이 들면서부터 종손이라는 멍에가 싫었다. 아버지도 할아버지 가신 후 당숙들의 등쌀에 시달리셨다. 그래서였을까, 아버지는 내게 장남이나 종손 같은 책무를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조상 모시는 제례(祭禮)에 진심이셨다. 아홉 분 모시는 사대봉사(四代奉祀)를 필두로 설과 추석 명절, 그리고 한식 묘제까지. 사당에서 지내는 시향제 때는 큰 며느리를 앞세워 대전으로 손수 제수를 장만하러 다니셨다. 큰 자식을 그렇게 가르치신 것이다. 가실 때쯤해서 그러셨다. 그동안 큰 며느리가 시애비 잘못 만나서 큰 고생을 했다. 나 없으면 주과포(酒果脯)만 써라. 언제부터 그리할까 고민하고 있다. 편(䭏) 하나는 추가할까 생각하면서. 
   아버지의 계단을 세고 있다. 계단 근처의 장미, 치자(梔子), 연산홍 근처에 웃자란 잡초를 뽑아내면서 계단을 쓸다가 잠깐잠깐 아버지의 온당에 앉아본다. 몇 해 전에 그 자리에 맷돌을 앉혔다. 그때 아버지 생전에 앉은뱅이 의자를 하나 놓아드렸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팔걸이가 넓적해서 양쪽에 책과 커피잔을 놓을 수 있게. 아니다, 치워라, 여기 그냥 앉는 게 좋다.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다. 계단 중간쯤 오른쪽에 심은 치자나무가 7-8월이면 조용히 하얀 꽃을 피운다. 아버지가 좋아하셨을 향기가 은은하다. 나는 아버지께 해드린 것이 별로 없다. 용돈을 많이 드리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걸린다. 남편에 현명하고 자식들 바르게 키운 ‘머리 맑은’ 아내를 맞은 것 하나를 아버지는 으뜸으로 치셨을 것이다. 위안으로 삼자면, 너는 그저 그거 하나로 됐다 하셨을 것 같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다. 어느덧 나도 가끔 ‘계단 하나가 더 해 질까’ 하는 망상에 사로잡히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