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발(發) 커피 공정무역

2025-09-04     양승윤(회남면 산수리)

  네덜란드는 350년 동안 인도네시아를 식민통치한 나라다. 세계사는 이 기간을 네덜란드동인도회사(VOC)시대, 열대작물강제재배시대, 윤리정책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첫 번째 시기에 VOC는 막강한 군대를 동원하여 오늘날의 쟈카르타를 건설하고 향료무역을 독점하였다. 그러나 VOC가 빚더미에 올라앉자 본국 정부가 나서서 커피와 후추 등 열대작물 재배를 강압적으로 시행했는데, 그 중심 도서가 쟈바였다. 그게 두 번째 시기다.  
   물타뚤리가 쓴 소설 <막스 하벨라르>가 윤리정책시대를 열어젖혔다. 1860년에 간행된 막스 하벨라르에 대한 찬사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뉴욕타임즈는 1999년 지난 1000년의 전 세계 문학작품 중 이 책을 으뜸으로 꼽았으며, 영국 서섹스대학은 같은 해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으로 선정하였다. 네덜란드문예진흥원도 2002년 소설 막스 하벨라르에 지난 1000년 네덜란드 문학사상 최고의 걸작이라는 영예를 헌정하였다.  
   소설의 주인공 막스 하벨라르는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식민정부 하급관리였다. 그는 쟈바 농민들에 대한 학정과 수탈에 ‘문명국가’라고 믿었던 조국의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불모지 개간에 농민들을 강제동원하고, 식량 자급도 힘겨운 이들에게 각종 열대작물을 강압적으로 재배케 한 후 헐값으로 강탈하여 본국으로 실어 날랐다. 네덜란드 국고는 넘치고 쟈바 농민들은 수없이 스러져 갔다. 그러나 아무도 이들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막스 하벨라르는 피를 토하며 외친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악은 양심의 부재(不在)라고.
   1860년 막스 하벨라르가 발간되자마자 네덜란드뿐만 아니라 전 유럽 사회는 격한 충격에 빠졌다. 지식인을 자처하는 유럽인들은 모두 이 책을 읽었다. 쟈바에서 정의실현을 주장하는 양심세력이 속속 등장하여 1870년에는 드디어 윤리정책 시대가 개막되었다. 원주민들을 위한 교육제도와 의료지원 체제가 생겨나고, 식민정책을 완화하는 새로운 정치적 환경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황금알을 낳는 쟈바를 네덜란드는 결코 방임하지 않았다. 강제농업정책은 철폐되었으나 네덜란드인들의 명의로 넘어간 토지 소유권은 오갈 데 없는 쟈바 농민들을 새로운 형태의 소작농으로 만들었을 뿐이었다. 
   우리는 신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숫자를 믿을 뿐이다. 이는 천부적으로 이재(理財)에 밝은 네덜란드인들이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말이다. 물타뚤리가 떠난 100년 후의 새로운 세상에 막스 하벨라르는 ‘공정무역의 꽃’으로 다시 피어났다. 자신들이 재배한 커피 원두를 헐값에 넘기고는 고리채에 시달리는 멕시코 농민들의 일상을 목격한 네덜란드 신부 프란스 호프가 그 꽃을 피워낸 주인공이다. 그는 커피 협동조합을 만들어 1988년 네덜란드로 직판로를 개척하면서 막스 하벨라르 라벨을 붙였다. 중간상인을 거치지 않는 공정무역 커피가 등장한 것이다. 막스 하벨라르를 기억하는 많은 유럽인들은 기꺼이 자신들의 기호품을 바꿔 무명의 작은 협동조합에서 공급하는 커피로 갈아 탔다.     
   막스 하벨라르 커피는 1988년 첫해 네덜란드 국내 소비량의 2%를 상회하는 성공을 거두면서 독일과 프랑스 등 50여 개국을 커피 공정무역에 동참케 하였다. 2011년 서울에도 공정무역 사무소가 문을 열었다. 2016년에 이르러서는 전 세계 74개국 2000여 국제단체가 커피 공정무역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네덜란드 국민의 3%가 막스 하벨라르 커피를 선택했다. 제값 받은 커피 원두의 중간비용은 커피농장 종사원들의 노동환경과 노동조건 개선에 돌아간다. 막스 하벨라르 재단은 커피에 그치지 않고 공정무역의 범위를 계속해서 확대하고 있다. 프란스 호프 신부가 공저(共著)한 <해적국가의 양심이 만든 공정무역>은 막스 하벨라르를 기리며 오늘도 ‘국제교역의 양심’을 일깨우고 있다.
   영국, 독일, 프랑스 사이에 낀 네덜란드는 작은 나라다. 국토면적은 4만㎢ 남짓하고 그나마 1/4은 해수면 아래에 있다. 인구도 1740만 명(2024년)에 불과하다. 그러나 영독불 이탈리아와 함께 명실상부한 유럽의 5대 경제 강국이며 한국에 앞서 국제무역 1조 달러를 달성하였다. ‘세계의 언어’로 통하는 축구의 나라다. 2002년 한 해 우리나라를 붉게 물들였던 축구의 장인(匠人) 히딩크가 이 나라 사람이다. 또 용감한 양심의 나라, 막스 하벨라르의 나라이기도 하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도네시아에 자신들의 식민통치를 사죄하고, 식민통치의 과거사에 함구하는 일본을 꾸짖는 나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