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쿨장미 붉은 아침에 ~

2025-06-26     김종례(문학인)

  잠에서 깨어나면 맨 먼저 커튼자락을 걷어 올려놓고, 작은 정원을 둘러보는 것이 첫 일정으로 굳어 버렸다. 밤사이 이슬 맞으며 피어난 다양하고 해맑은 얼굴들이 인사를 건넨다. 어제보다 더 다채로워진 개양귀비 색채, 황금 달맞이의 청초함, 토종 으아리와 덩쿨장미 꽃송이를 세어보다, 해가 떠오를까 봐 조급해진 마음으로 감나무 아래로 숨어든다. 간간이 지절거리는 새소리에 머리를 씻으며 멍하니 앉아 있는데, 문간 저만치서 바람에 펄, 펄. 펄~ 울고 있는 무엇이 보인다. 현충일 조기 게양을 잊어버릴까 봐, 남편이 새벽같이 달아매고 들판으로 나간 모양이다. 
  그런데 웬일일까! 애국자도 아니건만 덩달아 눈시울 붉어지는 현충일 아침이 아닌가. ‘나라를 위해 울 수 있는 날이 어디 그리 많으랴 ’라는 생각으로 정원 구석에 앉아 충혼 시 하나 응얼거려 본다. 가물거리며 희미해진 기억력을 동원해 세월의 징검다리를 되돌아가 본다. 아이들에게 외출도 자제하고 가무도 금지하라고 가르쳤던 현충일 사전교육, 그 다음날은 조기 게양을 잘 실천했는지 여부까지 체크하던 시절이 있었다. 아무리 가난해도 집집마다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이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하늘 높이 아름답게 ~  ’어디선가 가사도 잊어버린 동요가 풍금소리와 함께 환청으로 들려온다. 한일합병. 삼일운동. 대한광복. 6.25동란 등, 피에 젖은 역사적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등 돌린 어머니같은 조국의 얼굴’이 창백하게 어른거린다. 시인 한석산은 이국 땅에서 광복과 6·25를 겪은 조국을 생각하며, ‘부끄럽고 슬프다’라고 호소하였다. 제 목숨보다 더 사랑하던 자식에게 등을 돌리게 된 어머니의 핏빛 사연. 그렇게 비참한 어머니 가슴처럼 배신감에 파르르 떨리는 모습이 조국이라 하였다. 더 이상의 무슨 과장된 말과 미사여구가 필요할까 싶을 정도로 뭉클하다. 부모와 자식과의 정면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이나. 조국과 자유를 잃어보지 않은 젊은이는 절대로 알 수 없는 비통함이 있다. 지면 관계상 5연중에 마지막 연만을 열거해 본다.‘역사가 아프면 사랑도 아프다. 모국을 위해 눈물 흘리는 조선인의 혼. 등 돌린 어머니같은 조국의 얼굴. 울어라. 슬픈 민족이여~ 깊게 패인 살점이 드러난 어느 골짜기, 눈 감지 못한 어린 넋이 어머니를 부른다. 어머니~ 어머니! ’  
  어느새 떠오른 동녘 햇살에 덩쿨장미 한무더기 찬란하게 붉다. 6월의 태양 아래서 뜸 뜨는 꽃송이들이 호국영령의 넋인 양 눈부시다. 풍전등화 같았던 조국의 땅을 지키다 숨진 젊은이들의 울분이런가. 등돌린 어머니라도 애절하게 불러야 했을 절박함이 가슴을 때리는 현충일이다. 투쟁과 피로 나라를 지키던 그 시절 그때가 그리워지는 붉은 꽃! 나라를 위해 울 수 있는 충혼과 열정, 그리고 사랑을 샘솟게 하는 꽃! 아픈 역사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향기도 높은 덩쿨장미 아름다워라. 지난 세월의 무상함이 새록거리며 사라진 것에 대한 연민이 붉디붉어라.
  세계 역사 속에서도 유래가 없는 국가적 사태들이 온 땅을 흔들어대던 6월이다.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통곡하는 6월이 흔들거리며 지나간다. ‘소중히 사랑했던 것들이 사라진다 하여도 그다지 아쉬워 말라. 꽃도, 시간도, 사랑도, 사람도 결국은 사라지고 마는 것을, 사라져 가는 것은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무형의 역사를 잉태하기에 슬프고도 아름답다.’ 어느 역사 컬럼에서 외웠던 문귀가 생각을 키워주는 아침에, 귀중한 것들이 사라진 후에야 아무 일 없는 것이 평화임을 깨닫게 된다. 애국뿐만 아니라 단결, 절약, 정의. 정직, 친절, 배려 등, 인성교육의 보석들이 사라진 이 시대는 뽑혀진 거목의 뿌리처럼 허전하다. 사라져간 것들중에 가장 치명적으로 다가와 눈물나게 하는 건, 진실이라는 영혼의 실종이라 하겠다. 미래의 주인공들을 위해서라도 마지막 희망인 진실의 보루를 세워야 할 시점이다. 기필코 동방의 인성예의지국을 반드시 회복시켜야 할 우리이다. 누구나 양심까지 속이면서 헛된 영광을 축척한다면, 언젠가는 후안무치(厚顔無恥)라는 파멸의 선물만 남길 터~, 끝내 인생 무상함을 찍는 것이 우주의 섭리이기 때문이리라. 거짓으로 위안받는 도금보다는 진실을 고수하다 상처받는 순금이 낫기 때문이리라. ‘진정 우리 안에 순금의 진실을 찾아내야 함을 자각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인 진실은 빠르게, 아주 빠르게 제비의 날개를 타고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영국의 문호 세익스피어 귀문이 6월의 덩쿨장미처럼 붉은 낙인을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