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엄니는 강했다
내가 대전사범부속국민학교를 1955~61년까지 다녔는데, 6.25전쟁이 53년 휴전했으니 그땐 먹고살기가 엄청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내가 다닌 학교는 교사를 양성하는 사범학교의 실습학교라 남자 한 반, 여자 한 반, 2개 학급으로 3학년까지는 혼성반 4학년으로 올라가면 견우(남학생)와 직녀(여학생)는 생이별하고 3년을 더 보내며 졸업했다.
필기와 실습으로 입학시험을 치르고 각 60명씩 입학을 했다.
이 학교는 대전 지역의 행정. 사법. 기관장은 물론 의사. 기업대표 등 돈깨나 있거나 권력이라도 있는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로 그 당시에도 자가용으로 등교하는 친구가 셋이나 있었다.
또, 일제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애가 대여섯이 됐다.
점심에는 도시락을 가져오셔서 교실에서 먹이고 빈 그릇 챙겨가는 엄니들이 많았는데 그때 나는 그들이 다 엄니인 줄 알고 안 오시는 내 엄니를 엄청 원망하고 그렇게 부러웠다. 사실은 식모, 지금으로 말하면 가사도우미였는데...
나는 위로 누님 두 분, 아래로 남동생 둘이, 이 학교를 졸업해서 교장 선생님이 우리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정도였는데, 울 집이 이 학교 학생 중 제일 가난했다.
그러나 공부는 젤 잘했다. 울 엄니 지론이 “공부는 때가 있고, 돈은 나중에 천천히 벌면 된다.”며 고루한 종갓집 어른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딸도 다 공부해야 한다고 종갓집 땅 팔고, 소 팔아 학교를 보냈다.
그 당시만 해도 여자는 공부를 안 시켰다.
후에 엄니가 판 땅을 다시 다 사서 원상 복구해 놓으니 울 엄니가 엄청 좋아하셨다.
1955년 내 나이 8살 때 난 이 학교에 입학했다.
입학시험에 대비해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본인의 이름을 외우고 쓰기는 물론, 산수 1에서 100까지 세는 법 등을 열공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입학시험장에 들어갔는데 항아리에서 흰 바둑알 50개, 검은 바둑알 30개를 골라내는 산수와 아버지, 어머니 이름을 쓰고 읽는 국어는 간단히 통과했는데 자동자 그림 맞추기에서 헤매게 됐다.
자동차 그림을 몇 조각으로 찢어놓고 제한 시간에 맞추는 요즘으로 말하면 퍼즐 맞추기였는데 아무리 맞춰도 자동차 바퀴가 3개밖에 안보였다.
자동차는 보는 각도에 따라 바퀴 하나는 가려서 안 보이게 된다는데 그땐 그걸 몰랐다.
자동차는 분명 바퀴가 4개 있어야 하는데 그림을 다 맞췄는데도 바퀴가 3개이므로 책상 밑에 바퀴 하나가 떨어졌나 허둥지둥 찾다가 시간이 지나서 못 맞추고 말았다.
그래서 그랬는지 몇일 후 시험에 떨어졌다는 연락이 왔다. 너무 억울해서 밥도 안 먹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며칠을 울었더니 엄니가 “학교 가게 해줄 테니 울지 말고 밥부터 먹어라”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이튿날 학교에 갔다 오시더니 학교 가도 된다고 했다.
나중에 누나한테 들으니 엄니가 교장 선생님 하고 담판을 하셨다 했다.
엄니는 “우리 집에서 지금 이 학교에 6학년, 5학년, 3학년, 2학년 딸 넷이 다니는데 그중 둘을 자퇴시킬 테니 우리 아들 하나를 입학시켜 달라. 두 명 퇴학하고 한 명 입학하니 학교에서는 손해날 것 없지 않느냐? 계집애야 안 다녀도 되지만 아들은 경주 김씨 대를 이을 종손인데 꼭 이 학교를 다녀야 한다. 교장 선생님이 들어줄 때까지 여기 이 자리에 있겠다”고 압박했다.
어안이 벙벙해진 교장은 “돌아가 계세요”하고 결국 입학을 허락해 오늘의 내가 있다.
교장 선생님과 담판으로 아들을 입학시킨 울 엄니가 여걸임이 틀림없다.
여자는 약할지라도 울 엄니는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