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과 조화
현악기의 공명과 현의 진동, 서로 대립되는 모순에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는 이치를 알게 된 건 40여 년 전이다. 초등학교 3학년 딸이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다. 아주 기초적인 음을 내는데도 그 소리에서 가슴으로 울림을 느꼈다.
음악이라 할 수 없는 단음인데도 울림을 느낀다는 것은 자식바보가 된 엄마라고 할지모르지만 분명 다른 느낌이었다. 내가 직접 현을 기타처럼 튕겨 보아도 말로 표현하기 오묘한 울림이 있다. 그냥 나무로 된 악기의 몸통을 퉁 쳐보았다. 음색은 다르지만 일반적 소리와 다른 울림이 있다. 그때 깨달았다.
현이 일정한 진동으로 소리를 낼 때 이 울림이 없다면 듣는 입장은 얼마나 무미건조할까. 나무로 된 몸체에 의한 공명은 오히려 현의 일정한 진동을 방해할 것이다. 그러나 그 방해 요소인 공명에 의해서 악기의 생명인 울림으로 조화가 이루어지고 아름다운 음률을 탄생시킨다. 서로 대립 관계가 조화로운 관계로 잇게 되는 것은 대립되는 두 요소가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바로 어느 한쪽이 자신만을 내세우지 않고 적당하게 하나가 되도록 조율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대립이 하나가 되는 것. 세상의 모든 생명들이 함께 살고 있다는 인식을 못하고 저만 제일이라는 생각을 갖는다면 함께 멸망하는 사태가 발생할 것이다.
나무의 뿌리가 땅속의 물을 이파리에게 올려 보내고 잎은 탄소 동화작용으로 만든 양분을 뿌리로 내려 보낸다. 서로 자신의 본분을 충실하게 이행 하여 상대에게 내줌으로 서로 잇대어 생명이 유지된다. 만일 서로 믿지 못하고 확인하겠다며 잎이 땅속으로 간다든지 뿌리가 땅을 벗어난다면 자신부터 생명을 버리는 것이다. 함께 살기 위해서 주거니 받거니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삼라만상의 이치가 이렇게 서로를 존중하며 상대의 능력과 소명을 믿으면 상대도 나를 믿고 맡긴다. 상대와 내가 다름을 인식하고 맡은 본분을 충실하게 이행하여 내줌으로서 조화로운 대립이 신비롭게 상부상조가 된다.
기원전부터 철학자들이 상반된 대립과 조화로 아름다움을 논했다고 한다. 초기 피타고라스학파 역시 유한성과 무한성, 짝수와 홀수, 직선과 곡선의 대립에서 조화를 본 것이다. 상반되는 두 요소 중 하나를 배재하는 것이 아니라 두 요소가 지나치지도 않게 부족하지도 않게 유지하며 존재해야 조화가 이루어진다.
요즘 젊은이들처럼 나는 이만큼 사랑을 주는데 너는 왜 조금밖에 안주느냐고 불만이 싹튼다면 삶의 이치는 불협화음으로 깨지고 만다. 불만을 품는 다면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뿌리가 양분이 모자라서 더 원한다면 잎에게 불만을 품는 것이 아니라, 물을 더 충분히 올려 보낸다.
우리나라가 지금 뿌리 채 흔들리고 있다. 국민의 입장에서는 정치 중심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언론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문제는 발전을 원하면서 자기편의 말만 듣고 저쪽을 피하는 태도의 모순이다. 위기 없는 인생 공명 없는 악기는 발전이 없다. 소통이 없으면 발전을 무너뜨린다.
우리나라 정치판이 그렇다. 말은 발전을 원하면서 소통은 없고 자기네 주장만 옳다고 우긴다. 나처럼 시골 할미의 눈에도 어느 정도 보인다. 하지만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이 옳다고만은 할 수가 없다. 어느 쪽은 대통령이 입만 벌리면 거짓말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쪽에서는 야당 대표가 숨 쉬는 소리 말고는 죄다 거짓말이라고 한다. 또 이쪽은 죄 없는 야당당수를 검찰독재가 몇 년 동안 재판을 질질 시간을 끌며 괴롭힌다 하고, 저쪽 사람은 야당당수를 두고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잘 피한다고 법꾸라지라고 한다. 지은 죄를 회피하면서 시간을 벌어서 대통령자리에 앉고 보자는 꼼수라 한다. 국민의 입장에선 한쪽 언론에만 의존해서 옳고 그름을 평할 수 없다.
사회의 혼란을 일으키는 위험 요소는 뉴스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뉴스를 만드는 다수의 기자들 개인 생각을 마치 진리인양 믿고 이러쿵저러쿵 모여서 평론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런 혼돈의 시기에는 여와 야의 주장에 어느 한쪽을 배재하지 말고 양쪽이 서로 존재를 인정하면서 조화로울 수는 없을까. 참으로 안타깝다.
사람과 사람 관계도 악기처럼 잘 조율해서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지고 평화로운 사회가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