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세상
오는 5월 세계라면축제가 부산에서 개최된다는 소식이다. 1997년 일본에서 시작된 이래 라면 총회 겸 축제는 2년마다 라면 생산 대국에서 돌아가면서 열리는데, 우리나라에서는 2006년 서울에서, 이번에는 부산에서 2일부터 11일까지 열흘 동인 열릴 예정이다. 바쁜 세상으로 향해 달려가면서 간편식도 점점 더 간편해지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라면이다. 반쯤 조리해 놓은 면(麵)에 뜨거운 물을 부어 ‘언제 어디에서나’ 간편하게 한 끼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하나는 ‘누구나’가 있다. 부산 APEC 총회에 참석했던 천득렁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도 라면 애호가인데, 만찬을 마친 후에도 밤마다 라면을 주문했다고 한다.
2022년 통계로 라면 소비량이 많은 전 세계 10개국 중 우리나라가 8위에 올라있다.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이 수위를 차지하였고, 한국 이외에도 인도, 일본, 미국, 필리핀, 태국, 브라질이 차례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개인별 소비량이 많은 나라로는 2013년 이후 세계 1위 자리를 지켜온 한국이 2021년 베트남에 1위 자리를 내줬다. 베트남은 연간 87개, 우리나라는 73개였다. 케이팝(K-pop)과 김치 덕에 한국의 매운 라면이 인기다. 2024년 매운 라면 세계 10선(選)에 한국이 4개, 말레이시아가 4개, 중국과 인도네시아가 각각 한 개씩 뽑혔다. 같은 해 10월까지 우리나라의 라면 수출고는 10억 2천만 달러(1조 5000억 원)에 달했다. 1969년 최초로 라면을 베트남에 수출한 이래 2022년에 수출대상국이 전 세계 143개국으로 늘었다.
한국의 라면 역사는 1963년에 시작되었다. 원조는 삼양라면이었다. 헤럴드경제신문이 2023년 4월 19일 자로 ‘환갑나이 한국 라면의 역사’를 특집으로 싣고 있다. 지난 60년 동안 신라면, 삼양라면, 진라면 등 우리나라의 세 대표 라면의 누적 판매량을 합치면 575억 개(봉지)나 된다고 한다. 이를 무게로 환산하면 약 690만 톤으로 30만 톤급 초대형 유조선 23척의 무게와 같다는 얘기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라면을 기준으로 한 봉지의 면발을 풀어 놓으면, 그 길이가 대략 46m란다. 이를 기준으로 575억 개의 면발을 잇는다고 가정하면, 총 26억 4500만km라는 계산이 쉽게 나온다. 달까지의 거리가 38만4,800km임을 감안하면, 무려 3,440번이나 달을 왕복하는 길이가 된다. 라면의 면발을 그렇게 늘려 놓을 일은 있을 리 만무하지만, 오늘날 ‘세계인의 언어’가 된 라면의 생산과 소비는 정말 대단하다. 라면을 먹는 방법도 나라에 따라 조금 다르다. 끓는 물에 면과 스프를 넣고 잠시 더 끓이다가 달걀이나 야채 또는 고기 등을 첨가하는 것이 기본적인 조리 방법이지만, 1인용 용기에 담긴 라면에 더운물을 부어 먹는 즉석라면도 많이들 찾는다. 도시락 라면이 많이 팔리고 있는 이유다. 중국에서는 파오몐(泡麵)이라 불리는 봉지 라면이 인기라고 한다. 파오몐은 물이 끓고 있는 냄비에 면과 스프를 넣는 것이 아니라 면과 스프가 들어 있는 라면 봉지를 뜯고 그 속에 끓는 물을 부어 먹는 방식이다. 양념을 첨가하면, 맛이 더 좋을 것은 뻔하다. 인도네시아 현지 유학생들의 경험담을 듣고 수퍼르미(라면 異名의 하나다)에 매운 고추 쨔베 히죠(cabai hijau)를 두어 개 넣어서 끓였더니, 매캐한 맛이 아주 좋았던 기억이 난다. 이곳에서는 ‘미고렝’이라 하여 야채와 고기를 썰어 넣고 기름에 살짝 볶아먹는 라면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재직 중 매 학기 한두 차례씩 열었던 국제 세미나에 동남아 학자들이 많이 참가했다. 적은 교내 예산으로 행사를 집행하다 보면, 어떻게든 비용을 아껴야 한다. 그중 버거운 하나는 마지막 만찬 후, 동남아 국가의 관례에 따라 귀국 선물을 한 아름 안겨 주어야 하는데, 이것이 작지 않은 부담이었다. 태국 교수 한 분이 이 난제를 해결해 주었다. 그분이 바지 뒷주머니에서 라면 포장지를 하나 꺼내 들더니, “딸래미가 이것을 꼭 사오라고 합디다. 어디서 구입할 수 있나요?”. 그래서 한동안 같은 상표의 라면을 여러 박스 씩 사 날랐다.
미식가(美食家)이셨던 선친께서는 ‘고기는 씹는 맛으로 먹고, 국수는 목을 넘기는 맛으로 먹는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국물이 국수의 생명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전통 국수인 장터 국수는 대개 굵은 멸치로 국물 맛을 내고, 잔치국수는 원래 닭 국물에 말았다고 하셨다. 멸치와 닭 뼈로 우려낸 토종 국수가 우리들의 생활 주변에 더러 남아 있어 라면 공세로 잃어 가는 국수의 옛 맛을 지키고 있음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무려면 플라스틱 용기에 자동화 기계가 담아낸 라면 맛이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아내가 정성껏 조리한 맛과 같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