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하는 인간
인간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아니, 실수하며 살아간다.
일본 근대 작가 아쿠타가와(芥川)는 「인생(人生)」에 대해, ‘태어나자마자 커다란 경기장과 같은 인생 속에 발을 디미는 것이다.…그러면 상처를 입지 않고 인생의 경기장을 나설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아무 사전 지식이나 준비 없이 태어난 우리가 세상 속을 살아가는 동안에 왜 실패가 없으랴.
‘또, 인생은 낙장(떨어진 페이지)이 많은 한 권의 책과 같다’라고 말했다. 여기저기 실수와 상처가 있지만 그래도 각자가 하나의 인생이라는 뜻일 게다.
세계인이 실시간 생중계로 본 12.3 비상계엄은 헌법에서 정한 절차나 요건을 갖추지 않아 분명 오판한 실수다. 그로 인한 국정의 혼란과 국민의 불안, 경제상황의 악화, 엄중한 시기에 외교의 타격, 나라 이미지 추락 등 손실이 너무 크다. 실수하고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본말이 전도된 말로 호도한다.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결국 책임은 최종 결정권자가 져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엔 더 크고 뼈아픈 후회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심은 대로 거두고, 민심은 천심이다.
법과 정치는 다르다. 법으로 정치를 다 재단할 수 있는가. 상대편을 인정하지 않고 어떻게 협치를 할 수 있는가. 누구 탓만 할 것도 아니다. 잘못 선택한 책임도 통감하고 앞으로는 주권자로서 선출할 때 바른 판단을 해야 하겠다.
우리나라 소위 지도자급에 있다는 일부 정치가들의 생각과 언변이 국민의 일반적인 의식 수준을 못 따라가는 것 같다. 유머와 여유도 없다. 경제 사회 문화가 저만치 앞질러가고 있는데, 정치는 뒷걸음을 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왜일까. 진영 논리에 갇혀서 합당한 인물을 못 뽑은 데 기인하기도 하고, 이해관계에 연연하여 독립적인 판단을 못하고, 패거리 집단의 논리를 앞세우기 때문이리라. 나라를 위해 어서 편협한 좌·우 편 가르기와 갈라치기의 색안경을 벗어버려야 제대로 보인다. 어째서 돈과 허명만 쫓으며 무책임한 말을 일삼는 허깨비 유투버와 사이비종교인 들에게 현혹되는가.
지구촌 어디선가는 전쟁이 발발하는 엄혹한 국제 정세와 무역마찰의 파고가 밀려오는 현실이 우려된다. 지난 80년간 남북 분단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는가. 통일 한국을 지향하며 먼저 합심 협력과 나라의 안정이 필수 불가결이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근간인 법, 헌법의 정신을 존중해야 마땅하다.
우리나라에 진정한 보수와 진보가 있는가. 정치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은 듯도 하고 흑백논리가 문제다. 예부터 중용(中庸)을 중시하던 나라에 바른 중도(中道)의 설 자리는 어디인가. 중간층이 두터우면 중심을 잡고 합리적 중도의 길을 걸으며 그때그때 정책과 인물 본위로 선택하여 다툼을 줄이고 화합을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지 않을까.
미국이나 유럽인들도 한국인의 역동성과 민주주의의 회복력을 평가하고 있다. 일시 혼란스러운 것 같지만, 조만간 복원되리라 기대하고 있다는 말이다.
단기간의 압축적 근대화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뤄 한강의 기적을 이룩했는데, 그 부작용과 후유증을 홍역처럼 심하게 앓고 있는 중이라고 본다. 자본주의 하의 과당 경쟁과 개인주의의 팽배, 빈부·도농 격차 등과 일제강점기 역사 정립의 문제, 남북분단 이데올로기의 망령이 때때로 고개를 쳐들어 국론 통일을 저해한다.
그러나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만큼 단련이 됐다고도 볼 수 있다. 국정의 혼란 사태에도 여전히 고속도로를 끊임없이 달리는 짐 가득 실은 트럭·탑차 행렬과 대양을 누비는 대형 유조선과 컨테이너선들, 무엇보다도 땀 흘려 일하는 농민들과 산업현장을 지키는 노동자들, 각 부처의 전문 관료들, 그리고 K컬쳐의 세계화와 100만 인파의 질서정연한 시위문화의 축제화, 그 정점에 국격을 한층 높인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 모든 현상으로 볼 때 우리 사회가 쉽사리 퇴행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바램. 위정자가 시대와 국민의 마음을 잘못 판단한 실수로 인해 일시적 혼란과 불안이 가중되긴 하였지만, 이번의 사태도 조만간 지나가리라고 미루어 짐작한다. 자신감 이전에 믿음이다.
광막한 우주 공간에 작은 유성(流星)처럼 우리 인생도 바람을 헤치고 부대끼며 흘러가고 있다. 무언가 원점에서 옷깃을 여미고 다시 스스로를 돌아보며 새봄을 맞이할 때다. (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