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인의 이름으로

2025-02-06     김종례 (문학인)

  춥고도 어두웠던 겨울의 터널을 빠져나오니, 2월이 입춘을 모셔다 놓고 우리를 기다렸다. 아직은 겨울의 발뒤꿈치에 매달려 눈치를 보는 중이지만, 우주의 알람소리에 깨어나 성급하게 찾아온 2월이다. 나목마다 외로움을 견디던 텃새들도 꽃바람을 만나러 포로롱 날고, 봄날 피어날 꽃잎들이 우리네 가슴마다 미리 피어나는 중이다. 2월은 시샘의 달, 여백의 달. 정중동의 달 등 예명도 많지만, 내가 좋아하는 2월의 이름은 무명인의 달이다. 근하신년 커다란 대문을 통과하고는 3월로 가는 징검다리, 또 하나의 중문을 열고 들어온 기분이다. 자칫 모자라는 일수라고 무시할 수도 있겠지만, 찬란한 봄날로 가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터널이리라. 
   이처럼 2월의 날수가 짧은 이유에는 특별한 전설이 있다고 한다. 기원 45년전, 로마의 율리우스와 아우구스트가 태양력(율리우스력)을 만들 때, 2월에서 1일씩을 빼서 7월을 율리(JULY), 8월을 어거스트(AUGUST)라 명하며, 각각 31일로 늘려서 제 욕심을 채웠다고 한다. 그래서 2월만 애석하게도 28일짜리 모자라는 달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2월을 교훈삼아 바보처럼 살라고 신들이 저지른 장난인지도 모르지만, 동양에서도 2월처럼 좋은 달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세시풍속 설 명절이 끝나면서 한해 농절기가 시작되는 달이며, 한 단계씩 진급하는 아이들이 새 꿈, 새 희망에 부풀어 있기 때문이다.  월력을 마음대로 바꿀만큼 오만한 무소불위 권력이 무섭기도 하지만, 황제의 공명심에 희생이 된 2월이 2천년의 세월을 버텨온 것도 신의 뜻일 것 같다. ‘인간은 따급하고 부족할 때 신을 찾으나, 처지가 넘칠 때는 교만이 채워지고 불법이 싹튼다’라는 말에서 답을 찾고 싶어진다. 이렇게 사람을 탐욕적인 측면에서 두 부류로 나뉘어본다면, 주어진 30일도 부족하다고 남의 하루를 빼앗아 욕심을 채우는 이와, 빈약하지만 4년마다 주어지는 윤년의 하루에 감사하는 자로 분류될 것이다. 나는 해마다 2월이 오면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다. ‘욕심껏 채운 7월, 8월의 31일과 보너스로 주어진 2월의 29일 중, 그대는 어느 하루를 살고 싶습니까?’라고 ~ 말씀에‘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긴요하게 쓰임을 받을진저~’란 귀절이 떠오른다. 내 영혼은 어느 부류에 속하는지도 반성해 보는 2월이라서 더욱 좋다.
   아찔하다. 기가 막힌다. 그러나 다행이다. 한 알의 씨앗처럼 은둔히 숨겨졌던 무명의 밀알들이 잠에서 깨어났던 1월이었다. 눈보라 휘날리는 긴 겨울밤이 얼마나 추웠을까. 한치 앞도 예견할 수 없었던 어둠의 격정을 뚫고 깨어나던 밤이었다.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묻혀있던 밀알들이 토해내던 진실, 정의의 함성 아직도 쟁쟁하다. ‘한 알의 밀알이 썩지 않으면 밀알 그대로 남을 것이고, 썩어서 밑거름이 된다면 수많은 밀알을 재탄생시킬 것이다.’란 말씀이 실감이 났다. ‘한 알의 밀알이 세상에 드러나기란 쉽지 않다’라는 일반적인 견해가 무너지며, 각 분야에서 구심체가 되어준 무명인들의 힘이 뭉쳐지던 겨울이었다. 밝은 정신 속에서만이 자유평화가 머무르며, 미래창조의 근원이 숨어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이 피려면 이른 봄부터 소쩍새가 울어야 한다고 했었다. 소쩍새보다 더 진하게 울어준 무명인들의 울음이 헛되지 않도록, 자유민주주의 꽃이 활짝 피어나는 봄날이기를 고대해 본다.  
   무명인처럼 고요하나 봄날을 불러오는 달. 즉 전혀 미동함이 없어 보이나 진정한 액션을 꿈꾸는 정중동의 달 2월!  우리는 지금 혼돈, 왜곡, 불의. 고통을 통과하는 터널 속에 서 있음이다. 태양과 같은 절실함으로 다가오고 있는 봄날로 가는 징검다리를 건너는 중이다. 바보같은 사람이 있어야 잘난 사람이 돋보이듯이, 부족한 2월이 있기에 도화의 혼불이 기다리는 봄날이 더욱 찬란한 것이리라. 내가 먼저 가슴을 열고, 내가 먼저 미소를 보내며, 내가 먼저 그대를 사랑하는 2월이 된다면야 ~ 이름없는 모퉁이 돌이라도 유용하게 쓰임 받을수 있다면야~ 신께서도 이 나라 이 민족을 기필코 축복해 주실 것을 믿는다. ‘무명인들의 아름다운 기도소리 영혼의 합창 되어 광활한 겨울밤을 적시었네. 양심의 귀환 깨달음의 문이 열리더니, 봄날로 가는 중문도 활짝 열렸어라. 봄날은 쉬이 온다고~  봄처녀가 제 오신다고 하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