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보은(報恩)에 돌아오다

2025-01-23     최재철 (거현산방 한일문화도서관)
최재철

  공개적인 글쓰기는 부담이 크다. 정기적으로 써야하는 경우는 더하다. 특히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일은 설레기도 하지만 두렵기도 하다. 기고를 미뤄온 이유다. 
  금적산 자락 바로 아랫마을 거리고개(巨峴, 거현1리, 거현천의 원류)에서 태어나 수한초등학교(제25회)를 졸업하고 13세 되던 봄날에 고향을 떠나 어언 육십 성상(星霜)을 세상 속에 부유하다가 이제 고향에 돌아와 남쪽 마루에 앉아 따사로운 초겨울의 햇살을 쐬고 있으려니 지난 60년 세월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친다.
  아, 인생이여!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쁜 날이 찾아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이라는 러시아 시인 푸시킨의 시가 당시 눈에 띠었고, 중학 시절 책상 앞에 써붙여 두었던 모토 'Boys, be Ambitious!(소년이여 대망을 품어라)' 라는 클라크선생의 말도 소년들에겐 와 닿는 표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분은 19세기 후반에 삿포로에 와있던 미국인으로 홋카이도대학 농학부에 흉상이 있었다.  
  청주(대성중)를 거쳐 대전(대전고), 서울(한국외대), 도쿄(東京大學 비교문학비교문화 전공) 유학을 마친 후, 모교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언어문화학부 교수로 35년을 봉직하고 나서, 내 고향 보은 거현리 생가로 돌아왔다.
  긴 돌담은 여기저기 내려앉아 있었고 사랑채와 헛간채의 낡은 슬레이트 잿빛 지붕이 볼썽사나웠다. 동네에 옛 어른들은 몇 분 안 계시고 전부터 살던 이들은 10가구 정도이며, 7, 8할이 귀농인들이다. 
  마을 한가운데 400여년 된 둥구나무가 늠름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여전히 공기는 맑고 금적산과 덕대산 사이 마을의 풍광과 아늑함도 그대로다. 그래서인지 각 지역에서 귀촌한 이들로 마을이 채워지고 두터벌에는 신도시(?)도 생겼다. 그러나 그 많던 아이들은 눈에 띠지 않았다. 마을회관에 들러 인사 나누고 마을 행사와 회식에도 참석하며 어울렸다. 
  유년시절, 여름에는 토끼 먹이로 아카시아 잎을 따고 소를 몰고 풀 뜯어 먹이러 개울건너 건넝골과 앞산으로 다니며 풀짐도 지고, 한겨울엔 쇠죽을 끊이며 사랑방 화로에 고구마도 구워먹고 광 단지 안에서 얼음 박힌 감을 가져다가 아랫목에 녹여 먹던 달콤한 기억도 엊그제 같다.
  모내기철에는 논에 들어가 거머리에도 물리고 앞산 밭 일굴 때는 새참을 쟁반 머리에 인 어머니 따라 막걸리주전자 들고 뒤따르던 때도 있었고, 담배농사철에는 담배 순치고 잎 따서 짊어지고 내려와 마당에서 새끼줄에 엮어 건조실에 걸고 석탄 이겨 밤새가며 불 지피는 아버지(수한면 부면장 역임)를 돕기도 했다. 모내기나 담배 농사일 돕다가 힘들면, '나 공부할래!' 하고 사랑방에 들어가 문 닫고 있으면, 부모님은 왠지 다시 나와서 일하라는 말씀은 안 하셨다.
  농협에 취직한 큰형이 매달 정기구독하게 해준 어린이 잡지 「새벗」을 뒤적이며 ‘어사 박문수’나 ‘오성과 한음’ 이야기를 읽거나 만화를 보기도 하고 두툼한 백과사전과 국어대사전을 이리저리 펼쳐보곤 했다. 거현리에서 이렇게 지낸 어린 시절이 장래에 문학을 공부하게 된 토양이 됐는지 모른다.
  고향집과 서울을 오가며 돌담을 보수하고 사랑채와 헛간채의 지붕도 개량하고, 사랑채 안팎을 앞산 황토찰흙으로 바르고 헛간에 서재를 들이고 나니 말쑥해졌다. 그렇게 5년여가 흘렀다.
 재작년 3월, 서울집의 서재와 거실, 아들방, 안방까지 들어찼던 책을 사랑채로 옮기기로 했다. 5톤 트럭에 추가로 1톤 트럭, 거기에 서가를 시골집에 짜 맞출 기사 1명 출장 등 적잖은 책 이사 행렬이었다. 사랑방과 새로 만든 서재, 앞뒤 두지에 책과 자료 뭉치를 꽉 배치하고 나니 뿌듯했다. 하나 남은 광에는 추후에 연구소(마포)의 책을 옮겨 채우기로 했다.
  이 사랑채를 일러, "거현산방(巨峴山房) 한일문화도서관" 이라 부르기로 하고 현판을 제작하고 대문에는 스스로 디자인한 로고(‘거현’의 초성으로, 가로등 모양; ‘거리고개에서 등불을 밝히다’는 뜻)와 간판도 달았다. 그런대로 모양이 났다. 
  그리하여 2023년 4월 16일(日) 12시, 개관식을 하기에 이르렀다.(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