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온당

2024-11-28     양승윤(회남면 산수리)

   나이를 먹어가면서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난다. 아버지 호는 온당(溫堂)이셨다. 고향 집에 계셨던 말년에는 석하(夕霞)라는 호를 즐겨 쓰시기도 했다. 온당과 석하. 따뜻한 방과 저녁노을. 이게 아버지셨다. 일본이 조선을 병탄하던 해 회남면 산수리에서 태어나셔서 89세를 수(壽) 하셨다.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할아버지와 새어머니 손에서 유년기를 보내셨고, 동경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셔서 대전고와 충남대에서 교편을 잡으셨다.        
   아버지는 큰 자식이 교수가 되어 대학에 발을 붙이게 된 것을 어떻게 보셨을까? 교수는 학문과 제자가 있다. 네가 무슨 학문을 하겠느냐, 제자들에게 술이나 열심히 사줘라. 이게 늘 하시던 아버지의 말씀이셨다. 어느 날 아버지는 학교를 찾아오셨다. 자식을 만나러 오신 게 아니라 자식 학교를 둘러보러 오셨다. 아담한 캠퍼스, 근무복의 수위가 노교수가 분명해 보이는 아버지에게 정중하게 거수경례를 했다. 아버지는 ‘이게 대학이구나, 참 멋지다’ 하셨다. 교수실을 찾아 들어 오셨는데, 몇 분 원로 교수들만 자리를 차지하고 바둑을 두고 있었다. 신참 교수들은 원로 앞에 서면 주눅이 들어서 우편함에서 출석부를 꺼내 들고 황급히 퇴장하는 교수실. 아버지는 앉는 자리가 움푹 파인 낡은 소파에 한동안 조용히 앉아 계셨다. 누가 바둑 한 판 두시자고 했으면, 기꺼이 응하셨을 텐데. 나중에 그런 생각을 했다. 연구실로 전화가 왔다. 엄친께서 오셨다고. 내가 깜짝 놀라 헐레벌떡 뛰어 내려갔을 때, 아버지는 교수실을 나오고 계셨다. 나 간다. 그렇게 짧게 한마디 하셨던가 그랬다. 
   여러 해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두 분 할머니가 모셔진 선산으로 불러 학위기(學位記)를 소리 내서 읽게 하셨다. 가운을 걸치고 학위모(帽)까지 쓴 채로. 얼마 후 아버지는 옛 선인이 남긴 글귀를 담아 학위취득 기념 휘호를 ‘꽉꽉’ 눌러 써 주셨다. 짧은 한문 지식을 총동원해서 해석해 낸 것이, ‘내 몸이 즐겁고 내 앞에서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내 몸에 즐거움은 없어도 내 뒤에서 좋지 않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 둘 중에 어느 것이 나은가’(與其樂於身孰若無憂於其心 與其譽於前孰若無毁於其後)였다. 제자들에게 술이나 사주라고 하신 아버지가 아내에게는 늘 ‘선비는 가난하다, 가난해야 선비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교수 시절에는 매달 쌀 한 가마니가 전부였다. 어머니가 고생하고 자식들이 배고파해도 아버지는 내색하지 않으셨다. 먹고 사는 것은 에미한테 가봐라였다. 아버지는 말년에 자식들에 대한 세세한 평가와 걱정과 소망을 큰며느리에게 전하셨다. 유일한 예외가 큰 자식이었다. 가타부타 말씀이 없으셨다. 내려주신 휘호에 대해서도 그랬다. 
   아버지는 조상 모시는 사당과 당신의 온당을 손수 지으셨다. 설계부터 시공 완성까지 석 달 동안 공사장에 붙어 계셨다. 아마도 이 동안은 당신의 유일한 취미였던 바둑두기를 멈추셨을 것 같다. 열 평짜리 네모반듯한 삿갓 모양 벽돌집으로 전면 반은 신주 모시는 사당으로, 나머지 반은 두 쪽으로 나누어 당신의 온당과 부엌으로, 부엌 위 다락에는 독서용 탁자와 서가를 올려놓았다. 사당을 둘러싸고 앞뜰과 후원으로 대나무 숲이 물결치듯 솟아올랐다. 문밖으로 나다니는 길이 없어서 한 필지 땅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 천사 같았던 아내는 아버지의 고민을 듣고 조용히 동생들이 살던 집을 전세로 빼서 당시로는 큰돈 450만 원을 마련해다 드렸다. 참으로 눈물 나는 역경(逆境)이었는데, 염치없게도 내가 한 일이 없었다.
   아버지는 열심히 산수골 덕고개를 넘어 대전행 버스를 타셨다. 수북한 멸치 칼국수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우시고, 기원으로 향하셨다. 그 기원은 막차 탈 정류장 코앞에 있었다. 어쩌다 서울에 오시면 내 처남 오기를 기다리셨다. 2박 3일간을 꼬박 바둑을 두셨다. 쓰러지시면 어쩌나 걱정되어 처남에게 좀 져 드리라고 했지만, 매형은 바둑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며 일축하였다. 처남은 바둑으로 아버지를 거의 ‘가지고 놀았고’, 아버지는 단 한 번이라도 백(白)을 쥐어 보려고 진력하셨다. 아버지는 천국의 온당에서도 바둑을 두고 계실까? 야무지고 솔직하고 바르고 진심이며 예쁜 며느리를 생각하고 계실까? 온 맘을 쏟아부어 정성을 다했던 며느리가 파안대소할 때 제일 예쁘다고 하셨고, “너 때문에 행복하게 살다 간다”고 수백 번도 더 되풀이하여 말씀하셨다. 우리 내외는 오늘도 아버지 얘기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