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뮬리 속에서 건져올린 추억
울타리 옆에 밤나무가 반들반들 알밤을 쏟아내던 시월이, 찜통 태양을 잘 견뎌낸 감들이 노을빛으로 익어가던 시월이 갔다. 정원의 바스락대는 검불더미를 수레에 실려 보내는 요즈음, 인간사 한해를 뒤돌아보며 마음의 갈피를 낙엽처럼 날리는 중이다.
오늘은 핑크뮬리가 멋지게 피었다고 자랑하는 지인을 따라 찾아간 곳은 이식학교였다. 해방기에 이식분교장으로 개설, 이식국민학교로 승격, 내북국민학교로 편입과 통폐합의 수난을 거치며 근래에 폐교되더니, 결국 캠핑장이 들어앉아 버리고 말았다. 진입로에 다다르자 괜스레 설레이는 까닭은 유년시절 삼년간 머물렀던 학교이기 때문이다. 운동장으로 들어서자 바람에 흔들거리는 핑크뮬리 파도처럼, 잠잠히 잠들어 있던 내 추억의 파노라마가 덩달아 요동을 친다.
1학년 때 낮달을 잡으려다 거꾸로 빠졌다던 우물터가 아직도 흔적은 남아있지만, 옷을 다 벗고 우물에 뛰어드셨던 담임 선생님은 이미 고인이 되셨다. 우물 곁에 우뚝했던 벚나무 몇 그루는 자취도 없이 사라졌으나, 벚나무 아래서 공치기 하던 동무들의 얼굴이 핑크뮬리 속에서 일렁댄다. 금방이라도 나타나서‘내가 누구게?’하면서 눈을 가릴 것만 같은 착각 속에 빠져본다. 지금쯤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늙어가고 있을지 바람에게나 물어보는 순간이다. 철없어서 행복했던 기억의 꼬리를 붙잡고, 예까지 흘러온 세월에게나 물어보는 오늘이다. 내가 공부하던 교실들은 허름한 카페와 갤러리로 변신하였다. 현관 입구에 커다랗게 매달려있던 산타종 모양의 놋쇠종이 눈에 삼삼하니. 어디선가 학교종이 땡그렁 땡땡~ 사라져간 기억의 파편들이 화살처럼 와서 박힌다. 그 종을 울려주시던 하늘처럼 존경스러웠던 선생님들! 유독 2학년 때 담임 선생님과의 이별의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큰 주물난로 곁에서 한 아이가 장난을 치다가 넘어지려는 순간, 아이를 부둥켜안고 넘어지시어 한쪽 다리에 심한 화상을 입으신 선생님이 계셨다. 작은 시골 자취방에서 오랫동안 누워계시던 선생님과의 추억들이 참 많다. 밤마다 호야불 켜들고 공부하러 가는 우리에게 간식까지 챙겨주시며, 열심히 가르치셨던 선생님은 이듬해 봄날이 오자, 구불구불 오솔길을 따라서 둥근 언덕길을 넘어서 멀리 떠나셨다. 커다란 꽃잎 상처가 그려진 다리를 절룩거리시며 이식교를 떠나실 때, 전교생이 봉황리로 가는 징검다리까지 기차길 행렬로 배웅해 드렸었다. 아이들은 엄마 잃은 철새처럼 서럽게 울었고, 선생님도 불편한 다리를 절룩거리시며 하나하나 안아주며 울으셨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실로 아름다웠던 이별의 정수가 아닐 수 없다. 선생님을 보내고 돌아올 때의 시냇물 소리가 왜 그리도 서글프게 들렸는지~ 길가에 피었던 제비꽃은 왜 그리도 외로워 보였는지~ 그 이별의 잔상들이 오늘 핑크뮬리 파도 속에서 되살아나 눈물나게 하나보다.
나는 42년 긴 세월을 교단에서 보내긴 하였지만, 그때 우리 선생님처럼 진한 이별을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여기던 관념들이 소주잔 한번 쨍 부딪힘으로써, 감정도 눈물도 없는 전근으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는 선생님께 회초리를 맞고 가는 날이면, 학부형은 오히려 담임을 위로하러 방문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 시대의 교사나 아이들에게 이런 이별도 있었노라고, 이런 가정교육도 있었노라고 일러주면, 시대적 아이러니라고 코웃음을 칠 것이 분명하리라.
카페에서 나와서 그때 우리 선생님이 떠나셨던 오솔길을 찾아가 보니, 저만치 선생님이 넘어가셨던 언덕빼기가 반쯤 허물어져 앉았다. 힘겨운 삶의 고갯마루나 외로운 길목마다 간절하게 그리웠던 언덕길! 짙푸른 보리밭이 눈부시고 종달새 솟구치다 내려오면, 애들도 덩달아서 신이 났던 둥근 언덕길! 하얀 공깃돌이 나뒹굴면 해가 지도록 사방치기 하던 정겨운 길! 들꽃들이 피어나던 어머니 젖무덤 같은 언덕길이 분명 여기쯤 있었는데~ 지금은 휑하니 뚫린 2차선 아스팔트 길에 낙엽만이 날리는 중이다.
살다가 보니 세상의 둥근 것들은 점점 허물어져 버리고, 옛것은 모두 사라져가는 세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리라. 아련한 그리움과 애잔함의 조각들이 가을바람에 휘날리며,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핑크뮬리처럼 출렁거리던 하루였다. 추억이란 지나간 세월 속에 안개같은 영상임을 알아차리게 한 가을이 점점 깊어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