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로 그 중(中)을 잡아라”

2024-06-20     박평선(성균관대학교 유교철학 박사)

 오늘날 인간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화두 중 하나가 소통일 것이다. 소통이라는 의미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막히지 않는 주체는 무얼까?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 상호 간에 이해를 잘하는 상태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이 어떤 상황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일 수도 있다.

 최근에 한 대학생이 헤어진 여자친구를 살해한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다. 이는 서로 소통이 안 되어서 일어난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여자친구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자친구의 마음을 얻으려고 욕심을 부린 결과 자신의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저지른 범죄인 것이다. 

 나는 이러한 소통의 문제를 인간의 마음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사사로운 욕심이 조금도 개입되지 않은 선한 본성을 알아차리고 이해하는 능력을 소통능력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신앙심이 독실한 신자가 자신이 믿는 절대자와의 소통일 수도 있다. 곧 절대자의 메시지를 알아차리는 능력이 소통능력인 것이다. 

 모든 인간의 본성은 태어날 때부터 백퍼센트 선한 본성을 받아서 태어난다고 본는 것이 유교사상의 관점이다. 맹자께서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는 것도 여기에 근거한 사상이다. 따라서 누구나 마음의 도(道)를 잘 닦으면 선한 본성이 백퍼센트 선한 언행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사람마다 마음의 도에 불순물이 있게 되면 본성이 마음의 도를 통해 언행으로 드러날 때 분술문이 섞여 나온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불순물을 송나라 때 주자(朱子) 선생은 ”불승지환(不勝之患)“이라고 하였다. 이는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환란‘이라는 뜻으로 심리학에서 말하는 트라우마 또는 내적불행과도 같은 의미이다. 이렇게 사람마다 기질이 다르고, 행동이 다른 것은 불승지환의 오염정도에 따라 다르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승지환을 제거하는 노력이 필요한데, 선비들은 이를 수신(修身)이라고 하여 몸과 마음을 닦아야 한다고 말해왔다. 옛날 선비들이 매일 같이 글을 읽으며 수신(修身) 공부를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공자께서는 불승지환(不勝之患)을 닦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극기복례(克己復禮)“를 말씀하셨다. 이는 ’자신의 사사로운 욕심을 극복하고, 예(禮)를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알게 모르게 쌓아온 불승지환을 닦아내어 본래부터 선한 본성을 회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막 길을 건너려고 하는데 마침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꿔지면 그야말로 막힘 없이 소통이 잘되는 상태이다. 절대자인 신이 길을 건너려고 한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신호등을 파란불로 바꿔 준 것과 같다. 그런데 반대로 막 길을 건너려고 했는데 갑자기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뀐다면 어떨까? 이때는 빨리 건너려고 하는 사람은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그때는 바로 멈춰서 기렸다가 안전하게 건너라고 하는 신의 메시지로 알아차려야 한다. 그것을 유교에서는 ‘윤집궐중(允執闕中), 즉 진실로 그 중(中)을 잡아라’고 말한다. 그런데 성격이 급한 사람은 그 메시지를 무시하고 답답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이 평소에 불승지환(不勝之患)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순간을 극기복례(克己復禮) 해야만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다. 

 이렇게 순간순간 윤집궐중(允執闕中)을 하려면 극기복례(克己復禮)의 마음이라야 가능하다. 빨간 신호등이라는 현실 상황을 바꿀 수는 없지만 잠시 기다렸다가 가라는 신의 메시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의 마음 먹기에 달려있다. 만약 앞에서 언급했던 대학생의 사건에서 여자친구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더 좋은 인연을 기다리라는 신의 메시지를 알아차렸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훌륭한 의사로 거듭나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마트에 가서 물건을 들고 돈을 내면 손님이 되지만, 반대로 그냥 가지고 몰래 나오면 도둑이 된다. 결국 물건에 욕심이 나서 자신의 욕망을 극복하지 못하고 불승지환에 빠지게 되면 도둑이 되지만 극복하고서 정당하게 돈을 지불하면 손님으로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다. 마치 빨간 신호등일 때는 잠시 기다려야 한다는 간단한 이치를 알아차리고, 극기복례(克己復禮)를 하는 것이 곧 ‘윤집궐중(允執闕中), 즉 진실로 그 중(中)을 잡는 상태’인 것이다.  
     
 유교에서는 예로부터 성인(聖人)이 성인(聖人)에게 물려주는 도통심법(道統心法)이라는 것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4500여 년 전에 요(堯)임금이 순(舜)에게 물려준 도통심법이 바로 “윤집궐중(允執闕中)”이다. 오늘날 묻지마 폭력을 넘어 묻지마 살인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는 사회에서 진실로 그 중(中)을 잡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아지길 기원해 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