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간의 사랑 고백
마지막은 새로운 시작을 가져온다. 좋은 헤어짐은 좋은 만남으로 이어진다. <어버이날>이 있는 오월에 나는 부모님을 생각하다가 그리움에 잠긴다. 문득 어머니와 작별하던 일들이 떠오른다.
호상(好喪)은 없다. 모든 죽음은 아프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아픔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고자 견디며 노력할 뿐이다. 아주 오래전에 나는 어떤 특별한 결심을 했다.
‘먼 훗날, 우리 부모님 인생의 마지막 1년은 내가 모실거야. 모시며 평생 못한 효도 다 하고 평생 못 나눈 사랑 다 나누고 보내드릴거야.’
내가 그토록 신통방통한 생각을 한 것은 서울 어느 언론연구원에서 일하던 스물아홉 나이였을 때였다. 세월은 유수처럼 흘러 20년 후, 드디어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야 하는 때가 왔다.
“엄마가 많이 아프셔.” 언니 전화를 받고 나는 집으로 내려갔다. 어머니는 내가 돌봐드린 지 두 달 지난 어느 가을날 갑자기 심장마비가 왔다. 119구급차를 불러 도시의 대학병원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가려는데 “도중에 운명하실 수도 있어요.”라고 구급대원이 말했다. 나는 서둘러 아뢰었다. “엄마, 살아오며 제가 잘못한거 다 용서해 주세요.” “아니, 잘해줬어. 고마워.” 고요한 음성의 어머니 말씀에 억장이 무너졌다. 우리는 지금 작별인사를 나눈 것 아닌가! 다행히도 어머니는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으셨다. 그런데 그때부터 죽음의 신이 밤마다 병실을 기웃거렸다. 나는 어머니를 지키려고 불침번을 서며 혼신의 힘을 다해 사투를 벌여야 했다.
끝내 어머니는 봄 어느 날 혼수상태에 빠지셨다. 담당 의사는 이삼일 안에 돌아가시니 임종 준비하라고 했다. 아버지는 “늬 에미 살리려고 입원시켰던게야. 죽는다니 왠말이냐. 마지막 길 손잡아드려고 하니 집으로 모시고 오너라.”하셨다. 나는 혼수상태인 어머니를 엠불런스로 모시고 집으로 왔다.
어머니는 귀가 다음 날 깨어나셨다. 하지만 어머니의 육신은 이미 죽음의 강을 건너고 계셨으므로 삶으로의 귀환은 불가능했다. 어머니를 축제처럼 행복하게 보내드릴 방법이 무얼까? 깊은 산골에서 인생 짐을 지고 찾아오는 나그네들을 대접하고 보듬으며 이타적인 삶을 살아오신 어머니였다. 진짜 작별인사를 해야 할 텐데, 언어라는 그릇은 모친에 대한 나의 존경심을 담기에는 너무 작았다.
하여 나는 어머니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순진해지기로 했다. 나는 <우리 인사법>을 만들었다. “엄마, 사랑해!”였다. 나는 식사 때 밥상을 차려서 어머니 병상 옆에 갖다 놓으며 우리 가족들에게 제안했다.
“밥숟가락 들기 전에 먼저 다함께 물컵을 높이 들어요.
그리고, ‘엄마, 사랑해!’라고 합창하듯 한목소리로 크~게 외치는 거예요.”
그렇게 꼭 21일을 외쳤다. 아침에도 “엄마, 사랑해!”라고 외치고, 점심에도 “엄마, 사랑해!”라고 외치고, 저녁에도 “엄마, 사랑해!”라고 외쳤다. 기도 같은 ‘21일간의 사랑 고백’을 들은 어머니는 다음 날 새벽 여섯 시에 안심하고 이 세상을 떠나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