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망인회 보은군지회 이순영
회장 6·25! 그리고 가시밭길 인생
1991-06-22 보은신문
21세의 꽃다운 나이에 온 시집이었건만, 남편 송재옥씨는 좌우익 대립이 크게 심화되던 당시 보은군청년회 조직부장을 맡을맡큼 청년운동에 깊이 개입되어, 낮이면 면사무소에서 근무하고 밤이면 청년회 일로 집을 비우기 일쑤였다. 그래서 남편이 전사하기까지 4년여의 결혼생활중 실제로 남편과 생활을 한 것은 한달가량.
남편은 6·25 사변이 발발하고 피난민 대열에 밀려 대구까지 내려 갔다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인민군과 아군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다는 소식을 접하자 가족들을 부탁한다는 한마디 말만을 남긴채 국군유격부대에 자원입대, 무공을 세우다 1·4 후퇴때 경기도 양평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임신 3개월에 접어든 것도 모르고 떠난 남편을 원망하거나 청춘을 한탄하며 목놓아 울 수도 없었다.
팔순이 넘은 시조부모와 회갑이 지난 홀시어머니, 아직 나이어린 시동생, 그리고 몸속에 커가는 남편의 새로운 분신, 이 모두를 생활을 책임져야 할 무거운 짐이 눈앞에 있었기에 절망과 좌절로 찢기우는 가슴앓이를 안으로만 삭혀야 했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하고, 밤마다 삯바느질과 베짜기, 황무지를 개간하고 텃밭을 일구고 이도 모자라 옷감행상으로 동서남북으로 떠돌고…. 이렇게 생계유지가 될만한 것이며 닥치는대로 열심히 일했다.
피와 살가 뼈를 깎고 청춘을 바쳐 이한 만큼 시련도 계속 잇달았지만, 그때마다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 생활기반을 잡아갔다. 비록 지나온 인생은 가시밭길이었지만 어느덧 어린 아들은 장성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해 가정을 꾸미고 다복한 삶을 꾸려가 더 이상은 바랄 것이 없다. 자신은 어느정도 생활의 안정을 찾았으나, 아직도 어려운 생활을 꾸려나가는 많은 전쟁미망인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인지 이순영 회장은 "내가 고생을 했다지만 더 어렵고 힘든 생활을 하는 미망인들이 많이 있어요, 정부지원이 나아진 것도 요근래이고, 평생 어려운 생활속에서 아직 기반을 못잡고 있는데다,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한 2세들에게까지 생활고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적어도 아들 하나에게 만이라도 미망인 사후에 보상이 이어져 그들의 어려움을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6월 들어 부적 늘은 겉치레 행사보다는, 나라를 위해 희생한 구가유공자와 그 가족들을 평소에도 항상 잊지않고 사랑과 관심을 갖고 아껴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램을 말한다. 구순이 넘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내속리면 사내리에서 조용히 삶을 살아가는 이순영 회장은, 옛일을 더듬는 중에도 쉴사이 없이 고이는 눈물을 닦아내느라 여념이 없다.
(금주의 만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