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높았던 3·1만세소리의 선봉

아들 윤기문씨를 통해 듣는 독립운동가 윤정훈 의사

1991-03-02     보은신문
"독립운동가의 집안이다보니 경제적으로 살기가 그리 넉넉하지 않지만 나라를 위해 애쓰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은에서 선두적으로 독립운동을 위해 애쓴 독립운동가 윤정훈의사의 아들 윤기문(82)씨는 3·1일운동 당시를 회고하면서 눈물을 글썽인다.

내북면 서지리가 고향인 윤기문씨는 독립운동가인 부친에 대해 "내가 10살 때 한학자였던 아버지는 한일합방의 소식이 전해지자 보따리 장사로 가장, 독립운동에 참여할 동지를 규합하고 손병희 선생한테 태극기를 만들었다"며 "보은읍 산성리 노고성봉과 속리산 문장대에서 횃불을 올리도록 동지들과 약속, 3월 1일밤 10시경 횃불이 타오르자 보은 일대 여기저기서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드높았다"고 회고한다.

그당시 어린 나이로서 어른들틈에 껴 대한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쳤다는 윤기문씨는, 이로 인해 부친 윤정훈씨를 비롯한 인사들이 체포되었고 이때 윤정훈 의사는 모진 고문으로 반신불수가 되었으며 3년의 옥살이를 하였다고 전한다. 이 때문에 집안가족들에 대한 왜경의 감시가 삼엄해 집밖을 제대로 나다니지 못했다는 윤기문씨는 "부친은 옥살이를 마치고 출감하신 뒤 옥중에서 얻은 병 때문에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비분과 신음속에서 돌아가셨다"며 눈시울을 적신다.

독립운동가의 집안이라는 연고로 윤기문씨는 배움의 문턱엔 가보지도 못하고 밤중에 숨어서 문중어른들한테 한문을 배운 것 밖에 없다고. 윤기문씨의 부친 윤정훈 의사의 독립운동 공로가 인정돼 대한민국 건국헌장 대족장이 주어졌고 내북면 애향동지회에서는 윤정훈 의사의 묘소(내북 아곡국교 옆산)에 비를 세우고 그 뜻을 기리고 있다.

병이 깊어 부친의 묘소에 가보지 못하는 것이 늘 죄송스럽다는 윤기문씨는 부인 유판봉(84)씨와의 사이에 2남5녀를 두고 현재 삼산1구에서 큰며느리와 함께 살고 있으며, 그의 차남인 윤정용씨(45)는 조부의 유지를 받들어 현재 서울 마포구 자유총연맹사무국장을 맡아 활약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