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저녁 산양유 짜며 전원생활에 젖은 인텔리
마로면 오천2리 절골 양산박 농장 이 상 화·박 미 선 부부
2003-01-11 송진선
절골 해발 300미터 고지, 1만평의 농장은 오전에 겨우 햇볕이 들다 이내 높은 산에 가려 햇볕 보기가 어려운 곳이었다. 농장 이름이 ‘양산박(梁山泊)’. 이름답게 세상을 등지고 자연에 파묻혀 사는 곳임을 굳이 농장 이름을 들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산양 90마리, 흑염소 100마리와 거위 10여마리에다 양치기 어른 이상화(60)·박미선(52)씨 부부 두 명이 양산박 농장 가족의 전부이다.
지난해 유산양을 처음 입식한 이상화씨는 아침, 저녁 하루 두 차례 젖을 짜고 짜놓은 젖은 옥천에 있는 가공공장까지 운반해야 한다. 이 일말고도 유산양과 흑염소들에게 사료와 건초를 주고 분뇨를 치우면서 양들과 말동무도 해준다. 박미선씨는 중간 중간 흑염소를 증탕 가공한 진액을 주문처에 공급하는 일로 바쁘다.
유산양은 흑염소와는 달리 젖을 짜는 다소 번거로움이 있지만 칼슘과 철분이 풍부하고 비타민 A가 풍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일반 우유의 5배 이상 비싸지만 도시 부유층을 중심으로 수요가 늘어나고 오히려 공급이 달릴 정도. 이들 부부는 유산양을 하면서 자금 회전도 빠르고 어느 정도 생활에 여유를 가질 수 있어 유산양을 사육하길 잘했다는 생각이다. 이상은 양치기 아저씨 이상화씨의 현재 모습이다.
그의 과거 모습은 어땠을까. 경북 성주군 출신으로 고향에서 고등학교 까지 나온 그는 귀신도 잡는다는 해병대를 지원했고, 월남전에도 참전하는 등 굴곡 많은 20대 사나이(?)로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정치가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한국 외국어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당시 국내는 유신 체제하로 정치가의 길이 쉽지 않았고, 75년경 우연찮게 한국 원자력 연구소에 입사, 자신이 희망하던 세계와 방향이 180도 다른 길로 들어섰다.
지금은 대덕 연구단지 내에 있는 원자력 연구소에서 기획, 예산을 담당하고 연수원의 교수실장까지 지낸 엘리트 코스로의 탄탄대로를 걸었다. 도저히 산골에서 가축을 사육하는 모습은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가 재직 20년인 95년 사표를 던지고 가족들은 대전에 남겨둔 채 홀로 아무런 연고도 없는 마로면 오천리 절골, 경운기도 진입이 힘든 첩첩 산중으로 들어왔다.
수호지에 나오는 양산박처럼 세상을 등지고 자연과 벗삼아 개척자 정신으로 살고 싶었다는 것이 그의 변이다. 차가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넓히고 가축을 사육할 수 있도록 축사도 지었다. 옛날 주민들이 땔감을 구하러 다녔던 곳에 지나지 않았던 곳이 지금은 번듯한 농장의 모습이 갖춰졌지만 수년동안 밤잠도 설칠 정도로 고난의 연속이 었다.
처음 흑염소에 대한 생리도 모른 채 사육을 시작, 얼어죽기도 하고 새끼 낳다 죽는 등 제대로 키워보지도 못하고 실패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IMF가 터졌고 달러 상승으로 사료값이 폭등하고 건초값도 눈덩이처럼 오르는 외적 조건이 가축사육 경험이 부족한 그에게 포기를 하게 만들었다. 금융기관에 예치해두고 생활비로 쓰면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었고, 그것도 아니면 경관이 수려한 도시 외곽에 식당을 차려 영업을 하면 많은 돈을 벌 수도 있었을 퇴직금은 물론 대전의 아파트도 불과 몇 년사이에 흔적 없이 사라졌다.
대신 손에 쥐어진 것은 농협에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뿐. 그러나 어쩌랴 하늘만 탓하고 있는 것은 개척자 정신으로 무장된 그에게 용납되지 않는 것. TV도 볼 수 없었던 오천리 산골짜기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위성안테나를 설치해 컴퓨터 통신을 했을 정도로 컴퓨터에 일가견이 있던 그는 담배값이라도 벌기 위해 공공근로 전산화요원으로 참여했고, 또 외속 농공단지내 한 공장에서는 수위노릇도 하는 등 연구소 출신의 엘리트라는 자존심은 모두 버리고 상황에 적응해 갔다.
그러던 중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다시 흑염소를 입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동안의 쓰라린 경험은 교훈이 되어 지금은 100마리로 늘어났고, 지난해에는 젖을 짜는 유산양 30마리를 분양받아 90마리로 늘렸다. 그가 이렇게 축산인 이상화로 이름을 쓰기까지 가족들과 겪은 갈등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국은행 본점 출신의 인텔리였던 부인은 도시에서만 살다 TV시청도 할 수 없는 산중 생활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남편을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고 3년 전에 절골로 들어왔다. 하지만 사람 구경하기 힘든 산중 생활은 지금도 적응하기가 어려워 도시에 있는 친구들과 만나는 시간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래도 차츰 시골 아낙으로 적응하는 중이어서 아기 산양의 먹이를 챙겨줄 정도가 됐고, 올 봄부터는 젖을 짜야 하는 양이 늘어나 남편을 좀더 많이 거들어 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정도로 부인 박미선씨에게도 다소 여유가 생겼다. 이렇게 양산박과 같은 세상에서 살고 싶어하는 남편과 도시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웃고 떠들며 살고 싶어하는 부인이 서로 확연히 다르면서 같이 가는 동행 길에는 온순한 동물 양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