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아직 멀리있는데

정은광(원불교 보은교당 교무)

1997-11-29     보은신문
세상이 바쁘고 자꾸만 혼탁해지는 것 같다. 이럴때 내가 가는 곳이 있다. 그것은 서울의 한적한 한 공원이자 궁궐이었던 창경궁의 안쪽 비원이다. 이곳은 조선역사의 현장이자 조선의 정원이 모나지 않고 고스란히 관리 보존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이곳을 자주 가는 까닭은 교통편에서나 한가함을 즐기는 여유나 옛건을 바라보면서 정갈하고 기품같은 것에서 지금현재의 나를 생각하는 관점에서 일종의 정신적 위안인 셈이다. 마음이 꽉찬 계절이라고 하지만 떨어지는 낙엽이 바람에 소슬히 나부끼는 산야를 바라보거나 계곡의 물소리가 차갑게 느껴지면 나도 모르게 느끼는 삶의 외소함과 고독감같은 것이 이제는 불혹을 넘겨버린 것에 대한 나만의 불만같은 삶의 투정이라고 볼 수 있다.

가을 하늘이 맑고 새벽에 신문냄새가 싱싱하다. 어쩔수 없이 나도 세상인연과 접하면서 살아가는 이땅의 동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도 그 많은 은혜와 혜택과 삶의 아름다움의 본질에서 또다시 의미를 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본능같은 것이리라. 잊고 싶은 일들이 영상처럼 스쳐지나는 게절 때문에 가을이 싫다는 사람들도 이제 조용히 가을의 깊은 숨소리를 들어야 한다. 나무들이 잎들을 정리하고 바람앞에서도 당당한 겨울을 기다리며 산새들이 눈내리는 겨울밤의 한적함과 고교함을 선승처럼 기다리는 것도 이 가을이 앞서서 만들어내는 전위예술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빼놓지 않고 벼르던 창경궁의 비원을 찾아 갔다.

설악산의 그 화려함보다 더 넉넉히 단풍숲길이 나를 반기면서 왜 몇년만에 왔냐고 하는 눈치이다. 어디 그뿐인가 임금이 살았던 근정전과 왕세자들이 숨바꼭질하면서 놀았던 후원의 오솔길언덕 이것은 참으로 나에게는 커다란 역사의 광장이며 위안이다. 가을이면 나이를 먹으나 젊으나 어디론지 떠나고 싶어한다. 그것은 삶에 있어서 정리를 하고자 하는 정신적인 본능을 실현하고픈 마음의 기지개인지도 모른다. 누구 함께 갈사람 없을까? 부담없이 그리고 하루종일 말없이도 눈빛으로 세상을 다 이야기 할것 같은 사람없을까… 이렇게 가을에는 동반자를 찾는 계절이기도 한게 우리네 사람이다.

산들이 홀로 서있는 것 같아도 수많은 계곡과 수많은 짐승들을 거니느리고 사는 까닭은 이번에 설악산 한계령에가서도 알았다. 산 정상에 올라본 세상 하나의 슬픔같은 것을 산은 가지고 있었다. 양희은 노래의 한계령을 좋아했던 시절도 어느덧 10여년이 흘렀다.(저산은 내개 오지마라 오지마라 하고 길아래 젖어있는 첩첩계곡…)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가사는 우리의 삶과 인생의 참담한 여유를 송두리째 흩어내리게 하는 가슴짜릿함이 진진하게 숨겨있는 한계령을 아니 그 노래를 불러볼 때마다, 우리는 자신을 돌아다보는 생활속의 수도승이 된다.

가을에는 저마다 한 가지씩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그래야만이 살 수 있다 의미 깊은 책을 읽는 것도, 깊은 산의 산사에서 아침을 맞이해 보는 것도, 아니면 강원도 정선 동면의 어느 이름모를 집에서 민박을 하면서 삶을 생체기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더욱 더 음미하고 아름다움을 내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하늘이나 땅이 우리에게 주었다기보다도 우리가 자연에 의택하여 살아온 동양인의 오랜 습관같은 것이리라.

우리가 우리속에 슬픔이던지 기쁨이던지 그것은 개인이 가진 아름다운 성향에 대한 애착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것이 긴 여운의 삶의 내면에서 소화되고 정착될 때 삶은 고요하고 아름다운 내면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가을 멀리서 자기를 돌아보는 자연앞에 서성여 보자.


<정이품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