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본사은(報本謝恩)

박대종(보은문화원장)

1997-11-08     보은신문
「우리고장 사람들은 심성(心性)이 바르고 의(義)로아 충효예를 숭상하여 상경하애·우애를 삶의 근본을 삼아 은혜를 입으면 보답할줄 안다하여 보은이라 한다 이 숭고한 정신을 길이 이어받아 복된 터전으로 가꾸어 가자」참으로 가슴뭉클하고 자랑스럽다. 우리고장이 보은이란 지명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태종 16년(1416) 8월 이조(吏曹)의 요청에 의하여 그때까지 사용되어오던 보령(保令)이 서해안의 보령(保寧)과 음이 같아서 혼동하는 일이 많다하여 보은(報恩)으로 개정하면서 보령은 옛지명으로 남고 보은이라 칭하고 부르게 되었다. 아무튼 보은이란 지명은 말만 들어도 정겹게 느껴지는 지명이다.

그러나 이고장 보은이 역사적으로나 문헌적 기록상으로 타지역에 비하여 지명도가 뒤떨어지지않고 자랑할 만한 고장임에도 보은의 정신문화가 무엇인지 정립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고장 보은땅은 조선왕조가 안정되어가던 세종대에서부터 학문이 장려되고 성종대에 이르러 문운이 활기를 띄게 되면서 우리고장에 은거하고 있던 유학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고 회인출신 홍윤성이 세조를 도와준 훈구대신으로 활약했던것과는 달리 보은을 본관으로한 「김태암」북실출신 「김정」, 또는 「최수성」「구수복」등 충정어린 직언으로 훈구파를 비판하면서 위민정치를 주도하여 기묘사회에 연루했던 분들이 이 고장에 은거하면서 강학(講學)에 힘쓰므로써 의롭고 곧은 선비정신을 본받아 보은 사람들은 충효예를 바탕으로 살아왔음을 엿볼 수 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해낼 당시 호서대가람 속리산 법주사는 호국불교의 본 도장으로 나라를 지키는 정신적지주 역할이었던 것도 이고장 주민의 보본사은하는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충의 정신이라고 믿어야 한다. 우리 보은은 보본사은의 온건한 성품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부조리와 싸웠던 동학(東學)의 교조신원(敎條新元)운동과 척양척왜(斥洋斥倭) 보군안민의 통유문을 앞세운 외세배격운동에 앞장섰던 동학의 취회지가 보은이요 왜적과 마지막전투를 벌였던지역이 보은이었던 것은 보은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정의감 즉 보본사은(報本謝恩)정신이 그들을 이 지역에 받아들일 수 있었고 거기에 같이 참여함으로서 이루어질 수 있는 사항이라고 볼때 보은사람들은 본래 정의로움에 박수를 보낼줄 알고 부당한 일에는 분연히 반기를 들고 일어설 줄 알며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보답할 줄 아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수 있다.

일설에 의하면 조선조 3대임금이었던 태종이 서제들을 죽인 양심의 빚을 갚기 위하여 속리산 법주사에 천도불사를 베풀도록하여 서제들의 원혼을 달래므로써 늘 마음속에 부담하고 있는 불안한 심정을 떨쳐버릴수 있었고 정사를 잘할수 있게한 고장이라는 의미로 보은이라 정했다는 설도 있고보면 「보은」이란 지명이 더욱 자랑스럽기만 하다.

왕도정치의 훈구세력의 그릇된 판단에 비판할 줄 아는 꼿곳한 선비정신이 보은정신이요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할 때 우리 고장 보은이 중심 위치가 되었을때는 목숨을 던져 나라를 지킬줄 아는 충성심이 보은정신이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민주시민정신을 발휘한 곳이 보은이며 외세배격에 앞장섰던 동학정신이 보은정신이 것을 재인식하여 보본사은하는 마음으로 단합하면 머지 않은 장래에 살맛나는 보은으로 발전할 것으로 믿는다.

한국인의 삼일운동정신이 국민정신이요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이 한국인의 자존심이듯 우리 보은의 보본사은 정신이 보은정신이며 자존심인 것을 후세들에게 깊이 심어주어 부끄럽지 않은 고향을 물려주도록 노력하는 것도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해야할 과제인 것 같다.


<정이품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