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 농촌재생 추구하는 홍성군 ‘홍천마을’
<기획>붕괴되는 농촌, 그 대안을 찾아서 “쓰레기 매립장, 예술보고(藝術寶庫)로 탄생”
글 싣는 순서
1. 미술로 마을을 발전시킨 사하구의 ‘감천마을’
2. 삼국유사로 재생을 꿈꾸는 군위군 ‘장군마을’
3. 선비순례길로 마을 재생 시작하는 안동 ‘맹개마을’
4. 농촌재생의 최우수 마을!! 함안군 ‘장암마을’
5. 예술로 농촌재생 추구하는 홍성군 ‘홍천마을’
6. 인구절벽 보은마을 재생, 있는 것 활용해야
「우리 보은군은 1965년 11만3천825명의 인구를 기록했으나, 현재는 3만2천명이라는 인구절벽시대를 맞고 있다. 이로 인해 군민들은 절박한 위기위식을 느낌과 동시, 이를 타개할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있다. 이러한 군민들의 위기의식과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농촌재생에 성공한 선진지를 찾아 우수사례를 소개하고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사람들이 보은을 찾아오고 지역경제에 활력이 불어오는 미래비전을 제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쓰레기매립장에서 예술마을로 발전한 홍천마을
보은에서 서쪽으로 160여㎞를 달려가면 쓰레기 매립장에서 세계적 명소로 탈바꿈해 농촌재생에 성공한 아름다운 마을이 나타난다.
충남 홍성군 홍북읍 중계리 ‘홍천마을’이다.
20여년 전 150여 가구에 40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던 이 마을에는 쓰레기 매립장이 있어 오래도록 홍성군과 갈등을 겪었으며, 이로 인한 주민 반발과 갈등은 지속됐다.
이를 달래기 위해 홍성군에서는 홍성읍 공용주차장 운영권 일부를 이 마을에 제공해 소득을 제공했으며, 2000년에 1차, 2004년에 2차, 두 차례에 거쳐 집단거주지를 조성해 마을을 옮겼다. 고암 이응노 화백의 생가가 있었던 이들이 떠난 자리는 비어있어 황량하기만 했다.
때마침 문체부에서 고암 이응노 생가 기념관(이응노의 집)건립을 추진해 2011년에 개관하고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
이로 인해 쓰레기를 안고 살아야 했던 홍천마을이 한순간에 예술마을로 변신했고 전국 곳곳에서 예술인들이 찾아들었다.
쓰레기를 안고 살아야 했던 홍천마을이 ‘예술마을’로의 변신을 시작한 것이다.
때마침 2014년, 홍성군이 문화체육관광부의 ‘2015문화특화지역조성 공모사업’ 공모해 문화마을로 선정되면서 가속이 붙었다.
총 6억 원의 사업비를 확보한 홍천마을에서는 2015년부터 2017년의 사업기를 통해 마을주민 역량강화 교육과 공간마련, 마을홍보, 마을축제 등을 추진했고 축제는 지속해 이어지다 코로나19로 인해 지난해에는 개최하지 못했다.
마을에서는 주민역량을 키우기 위해 주민, 예술가, 공무원 3자가 참여하는 거버넌스 회의, 힐링반상회, 선진지 견학 등을 지속해 오고 있다.
이와 함께 주민이 직접 참여하는 ‘우리동네 목수’ 양성, 도자기, 홈패션, 정크아트 작품만들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 진행으로 주민의 역량강화는 물론 전문인으로 육성하고 있다.
마을을 홍보하기 위한 캐릭터, 블로그, SNS, 마을신문 제작도 지속되고 있다.
실제로 마을주민들은 예술마을사업을 추진한지 1년만인 2016년 예술마을의 정체성을 신문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이응노마을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창간호 1면에는 고암(顧庵)이응노에게 말을 걸다를 제목으로 “난 한국 사람이야. 난 충남 홍성사람이야, 조국 땅에 돌아가 묻히고 싶은 사람이야.”라며 고향을 그리워한 고암 이흥로 선생의 이야기가 사진과 함께 자세히 실려 있다.
주민의 역량강화를 위해서도 월1회 ‘주민힐링반상회’를 열고 공모사업을 통해 전개해갈 도예, 목공, 손바느질 등 생활문화 프로그램, 주민 미디어교육, 선진지 견학에 대해 주민 의견을 전적으로 반영하는 기회로 삼았다.
반상회 때가 되면 레크레이션 강사와 함께 힐링체조를 통해 즐거움을 만끽했으며, 끝나고 나서는 치킨, 피자, 다과를 즐기며 정겨움을 더했다.
이로 인해 주민 간 유대는 강화되고 주민의 역량은 지속적으로 향상됐다.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홍천군으로부터 문화특화마을조성사업비를 지원받아 구 마을회관을 리모델링해 전시장과 북카페를 열어 운영하고 있으며, 가마를 들여놓고 도자기 수업도 펼쳐지고 있어 홍천마을이 예술로 농촌재생에 성공해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홍천마을의 중심 ‘고암 이응노 화백’
홍천마을의 중심은 고암(顧庵)이응노 화백이다.
이 화백은 1904년 홍성에서 태어나 1989년 파리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삶을 그림으로 살아온 화가다.
독특한 예술세계로 살아생전 동양의 피카소라 불렸던 이 화백은 19세이던 1922년 해강 김규진 문하에 입문해 죽사(竹史)라는 예명을 부여 받고 수강했으며, 불과 21살이던 1924년에는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 사군자부에 출품해 입선하며 그 발전성을 예고했다.
이어, 30세이던 1933년에는 규원 정병조 선생의 문하에 입문해 고암이라는 예명을 받고 이를 평생 사용했다.
45세이던 1948년에는 홍익대 미술학부에서 주임교수로 활동했으며, 1956년에는 ‘동양화의 감상과 기법’을 출판하기도 했다.
1958년에는 ‘도불기념작품전’을 통해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알렸다.
이응노화백은 동양미술의 세계화를 위해 1958년 프랑스로 이주해 파리에 ‘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하고 후진양성에 나서는 등 본격적인 유럽생활에 돌입했다.
이후, 1967년에는 정부의 잘못된 판단에 의해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서울에서 30개월을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이후, 동양화 교습서 ‘수묵담체화법’을 발행하는 등 활발한 예술활동을 전개해왔으나 1989년 한국에 마련된 자신의 작품전시회를 앞두고 향년 86세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이응노 화백은 “나는 혼자 몰래 가벼운 마음으로 항상 그림을 그렸다. 땅위에, 벽에, 눈 위에, 그리고 검게 탄 나의 피부에 손가락이나 나뭇가지 또는 돌을 가지고서... 그림을 그리는 일 그것만이 변함없는 나의 행복이다.” 이응노 화백의 생전이 회고다.
그처럼 그림을 좋아해 그리고 또 그렸던 이응노 화백이 태어난 곳. 그곳이 농촌 재생마을이 되어 모든 이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이곳에는 이응노 화백의 생가, 초가집이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다.
‘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이라 명명한 이곳은 66,000㎡에 고암이응노 선생의 초가집 생가(75㎡)가 잘 가꾸어져 있으며, 1,237㎡의 기념관에는 이 화백의 작품 622점과 유품 581점 등 1,203점의 소장품이 보관 또는 전시되어있다.
또, 목조기와 지붕으로 지어진 고암학술연구실, 인근 축사를 사들여 있는 그대로 만든 ‘콘테이너 창작스튜디오’ 이응노의 집 입주 작가의 활동공간 ‘예술문화 전문자료실’등이 마련되어 이응노 화백을 기리고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용봉산이 바라다 보이는 이곳에는 연못과 산책로가 마련되어 연꽃이 활짝 핀 그 길을 걷다보면 마치 이응노 화백의 그림 속을 걷는 듯 황홀경에 매료된다.
역사와 예술의 중심 충남 홍성군
농촌마을 재생에 성공한 지역은 그 비결이 발견된다.
충남 홍성군은 5월말 현재 전체군민이 99,757명으로 10만명에 가깝다. 충남도청소재지도 이곳에 있어 이제 이곳 홍성의 옛 이름은 홍주(洪州)로 지역 명을 바꾸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그 뒤에는 보이지 않은 역사와 문화가 살아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홍성군은 독립운동의 대표인물 김좌진 장군의 고향이다.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 위치한 김좌진 장군의 생가는 복원되어 충남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세종을 모시고 훈민정음을 만드는데 기여했으나 단종 복위를 꾀하다 처형된 사육신 성삼문 선생의 고향도 이곳이다. 최영 장군도 이곳이 고향이며, 님의 침묵으로 잘 알려진 한용운선생도 이곳이 고향이다. 충의(忠義)가 살아있는 곳이다.
쓰레기매립장에 예술을 투입해 농촌재생마을을 이루어 가고 있는 홍천마을의 지속적 발전이 기대된다.
/기획취재팀 나기홍·김인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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