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를 주는 추임새

2021-04-01     오계자 (소설가)

자식들 다 독립해서 가정을 꾸리고 보니 가끔은 내 존재가치를 들여다보게 된다. 눈이 감긴다. 왜 싹틔워 주고 쭈그러든 씨 고구마가 눈앞에 알찐거릴까. 봄 내 키운 넝쿨 싹둑 잘라 꺾꽂이로 심고 속이 다 삭아버린 씨 고구마, 얼른 고개를 흔들어 지웠다. 일전에 원주 법천사지 답사 갔다가 천년의 세월을 어떻게 버텨왔기에 속이 텅 비어 사람들이 들락거리기 까지 했던 늙은 느티나무가 떠오른다. 고목의 텅 빈 속이 왜 이 시간에 떠오를까. 또 절레절레 흔들어 지웠다. 피하고 싶은 본능이리라.
애써 눈을 떠본다. 늘그막에 대상 없는 그리움, 막연한 기다림이 습성이 되고 있다. 바로 이 때 휴대폰이 진동을 한다. 반갑다. 답답한 가슴에 숨구멍이 뚫렸다.  
  “엄마, 고마워요”  “뭐가?”  “그냥 다요”
그냥 고맙단다. 전에는 애기가 열이 좀 나도 “엄마.” 하고 전화 할 수 있어서 좋았고 지금은 힘들 때 엄마 목소리만 들어도 힘이 된단다. 아들은 한 수 더 뜬다. 생활에 찌들만한 환경임에도 흔들리지 않고 내면을 위해 책을 들고 붓을 드는 엄마처럼 살 것이란다. 엄마는 저희들 삶에 표본이란다. 게으름을 피우다가도 열심히 사시는 엄마 생각하면 정신을 차린단다.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용기를 주고 힘이 되는 추임새다. 얼마나 멋진 추임샌가! 세상 살맛나게 한다. 역시 추임새는 기를 살린다. 이렇게 전화 한 통화에 금방 힘이 솟고, 녀석들의 말 한마디에 세상이 아름답다. 가족이란 이런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추임새가 된다.
2002년 월드컵 경기 때 우리는 하나 되어 붉은 악마의 장단에 맞춰 얼마나 열심히 추임새를 넣었던가. 온 국민의 부추김에 힘이 솟은 홍명보의 첫 골인에 입원실 환자들 까지 하나 되어 터져 나온 환성을 나는 잊지 못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끙끙 앓던 남편이 주사바늘 꽂힌 손으로 박수를 쳤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첫 골인이 환자들에게 추임새가 되어 다들 기운이 생겼었다. 
공부 못하는 자녀들 사랑의 회초리 보다는 사랑의 추임새가 더 좋은 열매를 맺는다. “우와, 그렇게 평소 공부 안 하는데 50점이나 했네, 조금만 공부 하면 80점은 거뜬하겠구나, 우리아들 우등생도 하겠다.” 이런 방법의 추임새는 기를 살린다. 화를 내고 호통을 치면 기를 꺾어놓지만 부하직원에게도 제자들에게도 추임새로 기를 살리면 모든 일에 활기를 불러온다. 
특히 판소리에서는 필수다. 가슴을 에두르는 절절한 호소력에 빨려드는가 하면, 전신이 움찔해 지는 천둥 같은 소리로 폭풍을 불러 오는 소리꾼에 ‘얼씨구’ 고수의 추임새 한마디는 소리꾼의 어깨가 절로 둥실 둥실 신이 난다. 어느새 반달부채 활짝 펴서 살랑살랑 구경꾼을 잠재우니 ‘으이’ 하며 북 장단도 자잔 해진다. 엉덩이 펑퍼짐해질 틈도 없이 절로 들썩 들썩 빨라지는 소리꾼의 흥에 ‘좋다!’ 추임새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더 신이 난 소리꾼 너름새 또한 흥에 겹다. 역시 추임새는 판소리의 생명이다. 추임새의 역할이 어디 판소리뿐이랴. 우리들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에 젖어들게 하는 씨앗이 소소한 언어들이다. 그 언어들이 얼마나 큰 응원이 되는가를 누구나 경험 할 것이다. “울 마누라 된장찌개 맛이 최고여!” 남편의 추임새 한마디에 빠져서 나는 된장찌개 준비를 할 때마다 그 말을 떠올리며 정성을 더했다. “어딜 가도 이런 맛을 찾을 수 없어.” 김치 먹으며 가끔 듣는 칭찬 또한 수십 년 세월에도 희나리가 되지 않고 김치 담글 때마다 그 목소리가 귀에 알찐거린다. 소소小小한 언어가 아니라 삶을 밝혀주는 소소昭昭였다. 일상에서 가족과 이웃이 서로를 빛나게 북돋움이 되는 소소昭昭한 말은 가정에 윤활유요 세상을 밝혀 주는 빛이 될 것이다.
언젠가 내가 생각해도 놀라운 순간 대처로 위기를 모면했던 일이 생각나서 사석에서 자랑삼아 예기 했더니 A는 “오 선생님 순발력은 전부터 잘 알고 있지요.” 하면서 기를 살리는데 B는 “잔머리 끝내주는군요.” 하며 분위기도 다운시키고 기를 꺾어놓았다. 긴 말이 필요 없이 현재 A는 건강함은 물론 인정받는 사회인이지만 B는 건강도 문제가 많고 요주의 인물로 지적된 상태다. 
가족과 주위 지인들에게 추임새 듬뿍 선물해서 훈훈한 가정 평화로운 사회 만들면 바로 자신에게 돌아온다. 얼마나 신명나는 세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