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 표시는 당연한 도리

어호선(탄부 사직, 방송인·수필가)

1997-07-19     보은신문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하고, 정다운 친구를 만나면 악수를 나누고, 웃어른을 대하면 존경의 인사를 드리고, 손아래 사람을 만나면 따스한 미소를 짓고, 생면부지의 사람이라도 고마운 말이나 행동에 대해서는 감사의 표시를 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요 이치로 배웠고 또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인간에게는 예의 범절이 있고 염치라는 게있다. 이것이 다른 동물과는 다른 점이다. 따라서 시대는 바뀌고 세태는 변했다 해도 법 이전에 예절은 사람이 서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사회적 약속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 실제 세태는 어떤가. 동방 예의국가란 말이 낯뜨거울 정도로 예의 도덕이 추락해 버린 게 사실이다. 서양 문물이라면 분별없이 마구 받아들여 개인주의가 팽만해진 나머지 「남이야 어찌됐던 나만 잘 살고 편하면 된다」는 극도의 이기심 때문에 아래 윗사람 구분도 없어졌고 예의 도덕은 땅에 떨어진 지 이미 오래다. 참으로 개탄스런 일이다. 잘 살게 된 것까지는 좋지만 예의 바른 우리 국민들의 정서가 어쩌다 이처럼 메마르게 됐고 추락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요즘 나는 엘리베이터를 탈 때만 하찮은 기계라지 만 이로부터 큰 감명를 받고 교훈을 얻는다. 오히려 부끄럼마저 느낀다. 최근 새로운 선보인 엘리베이터는 타고 내릴 때마다 층수 안내는 물론 『감사합니다』란 말을 빼놓지 않아 나를 당혹케 한다. 물론 컴퓨터 조작에 의한 말이긴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은 게 사실이다. 수십 층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수고를 덜어 준 엘리베이터에게 오히려 사람들이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거늘,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아무리 들어도 싫증나지 않고 듣기 좋은말은 『고맙습니다』『감사합니다』라 말이다. 여기다 상냥한 미소가지 곁들인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어느 누가 『감사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침을 뱉을 것이며 웃음 짓는 얼굴에 감히 돌을 던질 수 있으랴.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우리 사회에서는 『고맙습니다』『감사합니다』란 말을 들어보기가 어렵게 됐고 밝은 미소를 찾기가 힘들어 졌다. 각자가 생업에 쫓기다 보니 그럼 직도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성싶다. 버스나 전철을 타 보면 나이 든 노인 분들이나 아기와 함께 탄 여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아름다운 정경들을 보게 된다. 이럴 때 자신의 지정석인 양 말 한마디 없이 덥석 앉아 버리는 장면을 보게라도 되면 참으로 서글픈 생각이 앞선다.

어찌 그 뿐이랴. 버스를 탈 때나 택시 합승을 할때도 그렇다. 지정된 장소가 아닌 곳에 버스가 서 줬다거나 합승을 허용해 준 경우도 고맙다는 인사보다는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당당한 모습이라도 보노라면 울화가 치밀어 오름을 억제할 길 없다. 또 있다. 남의 발을 밟고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는 무감각의 사람들, 깜박이도 켜지 않은 채 끼어 들고도 손 한번 들어 '고맙다'는 표시마저 잃어버린 불감증의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내마음은 서글퍼진다.

이런 사람들은 '동방 예의국가'란 이 땅에서 살아갈 자격이 없노라고 치부한다면 너무 지나친 표현일까. 가는 정도 곱고 오는 정마저 곱다면 이땅에 훈훈하고 따스한 사회는 저절로 꽃피어 날 것이다. 은혜를 갚을 줄 안다는 내 고향 보은 이들이야 말로 누가 뭐래도 베푸는 호의에 감사할 줄 아는 예의 범절이 또렷한 사람들이라고 믿고 싶다. 잠깐 왔다 머물고 가는 것이 인생일진대, 우리는 서로 감싸 이해하고 사랑의 노래따라 입을 모아 나아갈 때 즐겁고 신바람나고 살맛 나는 세상이 열리리라 기대 해 본다.

우선 나부터 자신을 똑바로 봐야겠다. 그리고 처해 있는 위치에서 할 말과 행동거지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아는, 지혜로운 삶을 찾기 위해 나부터 소매를 걷어 붙여야 할 때인가 보다. 시성(詩性) 괴테의 『사라으이 찬가』한 구절이 불현듯 생각남은 웬 일일까. 사랑은 생에 활기를 주고 환희를 안겨주고 광명과 생명의 열쇠를 선사한다.

<정이품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