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아호 고봉에 대해
<기획>충암 김정선생 500주기 기념 8편
본지는 우리지역 출신으로 기묘명현 중 한 분인 충암 김정선생(1486~1521년) 500주기를 맞아 그를 조명하는 기획물을 준비했습니다. 기획 취지에 동의해준 김병서 필자께 지면으로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지면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필자가 소개하는 국역 충암집 내용을 가감 없이 독자들께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모자라고 부족한 글이지만 500년 전 귀향지 제주에서 절명한 보은 출신 충암 김정 선생의 삶을 반추해 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는 필자의 말을 독자들께 드리는 그의 인사로 대신 전해 드립니다. 본보의 취지에 동감하는 독자들의 성원과 투고를 통한 많은 참여가 있길 기대합니다. -편집부-
和彥叟以詩勸余移栽枸杞孤峯泉石上 (언수가 시로써 나에게 구기자를 고봉의 천석위에 이식할 것을 권하는 데 화답하여)
일(一)
葛巾木屐兼藜杖 / 摘葉掬泉茶酒當 (갈건목극겸려장 / 적엽국천차주당)
巖壑幽情世寡知 / 他年君到孤峯上 (암학유정세과지 / 타년군도고봉상)
갈포 두건에 나막신을 신고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 잎새를 따고 샘물을 마시며 차와 술을 대신하네
바위 골짝의 그윽한 정취를 세상에 아는 이 드문데 / 훗날 그대가 고봉에 오르면 알리라 *국역 충암집 상권 334쪽
이(二)
膏腴非所尙 / 澹泊天所養 (고유비소상 / 담박천소양)
移根近泉石 / 會見靑靑長 (이근근천석 / 회견청청장)
살찌고 기름진 것은 바라는 것이 아니요 / 맑고 담백함은 바로 하늘이 기르는 것이라
뿌리를 돌샘 가까이에 옮겼기에 / 늘 푸릇푸릇함을 볼 수 있구나 *국역 충암집 상권 335쪽
고봉(孤峯)은 학문을 연마하며 풍광을 즐겼던 고향에서 자주 다녔던 작은 동산인 삼파연류봉을 달리 부른 말로 후에는 또 다른 아호로 삼았고 이 시는 1514년(갑술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윤언수의 권유로 고봉 천석위에(泉石上) 구기자를 이식한 후 5언 절구 2수의 시를 지은 것이다.
한가로이 갈포두건을 쓰고 유유자적하며 지낼 수 있는 고봉에 대한 강한 애착과 정취에 대한 자신감을 엿 볼 수 있는 글이다.
지금도 마로면 관기리에 위치한 고봉정사와 고봉정을 통해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고봉을 언급할 때 고봉정사의 잘 못 된 안내문과 고봉사 건립에 대한 아쉬움을 빼놓을 수 없다.
(1)고봉정사 안내문의 오류에 대해
고봉정사 앞에 있는 안내문에 “이 정사는 조선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 때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문정공 원정 최수성 선생이 건립하여 문간공 충암 김정, 병암 구수복 선생 등과 한때 시를 읊으며 강학하던 곳이라고 전한다.”라고 되어있다.
이를 근거로 “고봉정(孤峰亭)은 기묘사화로 벼슬을 버리고 보은으로 내려와 은거한 김정(金淨), 최수성(崔壽城), 구수복(具壽福)이 교분을 나누었던 자취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곳으로, 기호학파와 호서사림의 형성에 싹이 트게 되는 역사적 장소이다.”란 글이 최근에도 일부 언론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있는 상태다.
한두 가지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대단히 잘못된 안내문이다.
먼저 충암집 및 고봉정사를 다룬 기록들과 건물 현판은 “고봉(孤峯)”이라 표기하고 있는데 유독 안내문과 고봉사 건물 현판만은 “고봉(孤峰)”으로 되어있다.
음과 훈이 같다 해도 고봉정사의 현판에 따라 봉(峯)으로 수정해야 한다.
작은 오기라 하기엔 대상이 역사적 가치에 따라 지정된 건축 문화재란 점을 감안한다면 간과할 수 없는 잘못이다.
1981년에 건립되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는 건축 문화재로 논하기에 무리가 있는 고봉사(孤峰祠) 현판은 휘호를 쓴 사람의 뜻을 존중해 당연히 그대로 둬야 한다.
사실 관계와 다르게 안내되어 있는 부분은 더 큰 오류로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수정되어야 한다.
①기묘사화 이후 충암은 고봉정에 갈 수 없었다
기묘사화로 금산(錦山)에 유배되었다가 진도(珍島)를 거쳐 다시 제주로 유배된 충암이 기묘사화 이후 구봉정사에서 시를 읊고 강학을 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금산에 유배 중 어머니를 뵙기 위해 잠시 고향집을 다녀와 또 다른 모함을 받은 후 올린 옥중소를 통해서도 유배지를 벗어나 고봉정을 갈 수 없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기묘사화 후 유배지를 벗어나 고향 보은과 고봉정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충암이였다.
②기묘사화 이후에 건립되었다는 점에 대한 의문
“이 정사는 기묘사화 이후 원정 최수성 선생이 건립”했다는 안내에 대한 의문이다.
1519년 발발한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보은에 은거하고 1521년 신사무옥으로 사사된 원정이 한가로이 정자를 건립했다는 것은 논리적 개연성이 매우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어떤 사료에 근거해서 기묘사화 이후에 원정에 의해 건립되었다고 안내하고 있는 지 궁금하다.
관련된 사료들을 통해서도 기묘사화 이전에 고봉정이 세워 졌음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오희상(1763~1833년)이 쓴 충암집 연보에는 “1506년(병인년)에 고봉정사에서 원정, 병암과 강연을 했다”는 내용이 있고 김창흡(1653~1722년)이 고봉정에 올라 시를 지었다는 송규렴(1630~1709년)의 제월당집 기록을 통해, 고봉정은 1506년 이전에 존재했었고 17세기 중, 후반 까지 고봉정으로 불렸음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잘못된 사실 관계에 근거해서 작성된 글이 지방문화재 앞에 서 있으니 저간의 사정을 살펴보고 전문가들의 엄중한 고증을 거쳐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필자의 엄친도 이러한 잘못을 지적하고 있으나 바로 잡히지 않고 있는 상태다.(미산산고 158쪽)
잘 못을 알면 바로 잡는 게 역사를 대하는 기본적 자세라고 본다.
고봉정은 친분이 깊었던 충암, 원정, 병암(충암과 도로써 사귀였다 함)이 학문을 논하고 풍경을 즐겼던 곳으로 기묘사화 이후엔 원정이 신사무옥으로 화를 당하기 전까지 병암과 함께 어울리며 충암을 추억했던 장소 중 하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원정 사후엔 병암이 후학을 양성하며 관리한 곳이라 할 수 있겠다.
삼현정이라고도 불렸던 고봉정을 병암의 5대손인 구봉우(具鳳羽, 1612~1681년)가 이전해 고봉정사를 지은 것으로 보면(17세기 중반 이후로 추측) 그 뜻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으나 현재의 고봉정사 자체는 충암선생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찾기 힘들어 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③수정 안내문에 대한 제언
안내문에 충암과의 연관성을 언급하려 했으면 최소한 다음과 같이 기술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봉이란 말은 삼파 연류봉이라 불리는 이 곳에서 학문을 연마하며 풍광을 즐겼던 충암선생이 명명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고봉정은 충암 김정 선생, 원정 최수성 선생, 병암 구수복 선생이 한때 시를 읊으며 강학하던 곳으로 원정 최수성 선생이 건립했다고 한다. 이후엔 삼현정으로도 불렸다”라고 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한다.
단, 이 경우 원정 최수성이 고봉정을 건립했다는 것이 사료에 의해 증명되어야 한다.
④원정이 건립했다는 안내에 대한 의문
고봉정사가 언제 누구에 의해 건립되었는지 필자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료를 확인할 수 없었다.
제작 년대가 알려지지 않은 고봉록(孤峯錄)에 수록된 고봉원정기(孤峯猿亭記)에는 원정이 충암에 이웃해 살기를 원했다는 정황만 기록되어있을 뿐 건립에 대한 기술이 없다.
충암과 원정의 돈독했던 우의를 감안해 보면 논박할 필요도 없으나 지정문화재 안내문에 기록되어 있는 관계로 검토할 가치가 있다고 보여 충암집에 의거 나름 유추해 보았다.
ㄱ.고봉에 살고 싶었던 충암
윤언수가 충암에게 고봉의 천석위에(泉石上) 구기자를 이식할 것을 권한 것에 대한 응답으로 지은 시에 “고봉은 구병산 아래에 있는데, 일찍이 그곳에 살고 싶었다(孤峯在九屛山下, 嘗欲卜居者)”라는 원주석이 달려있다. 국역 충암집 상권 334쪽
시의 후렴부의 “뿌리를 돌샘 가까이 옮겼기에 늘 푸릇푸릇함을 볼 수 있구나(移根近泉石, 會見靑靑長)” 구절로 보아 윤언수의 권유에 따라 구기자를 옮겼으리라 해석할 수 있다. 국역 충암집 상권 335쪽
ㄴ.고봉에 살았다는 충암
“창세 사군께서 두보의 운자를 쓴 것에 화답하여, 계언에게 보내고, 아울러 부쳐주는 글”에 수록된 시 중 “고봉노취연(孤峯老翠烟)”이란 구절에 대해 “고봉에 살았기에 나의 호로 삼았다(卜居孤峯, 仍以自號)”란 원주석이 붙어있다. 국역 충암집 상권 401쪽
ㄷ.고봉에서 출발해 화인 나루에 갔다는 충암
“입으로 읊은 절구 한 수(口占一絶)”의 직접 쓴 서문(小叙)은 “고봉에서 출발해 화인나루에 놀러갔다”는 “자고봉, 왕유화인도(自孤峯, 往遊化仁渡)”으로 시작된다. 국역 충암집 상권 471~472쪽
화인나루는 지금의 안내중학교 부근에 있었다고 하며 그곳에서 희암 김태암(1477∼1554년) 일행과 만났다는 내용도 기재되어 있다.
희암은 충암의 천거로 벼슬길에 올라 기묘사화로 파직 당한 후 고향인 보은에 은거해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자료에 따라 기술한 행적들은 고봉의 주인만이 할 수 있던 행동이고 할 수 있었던 말이라고 생각한다.
대의명분에 입각한 도덕적 이상향을 꿈꾸며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 11가지에 이르는 생활규범을 정했던 충암이 자신의 소유가 아닌 곳을 대상으로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으로는 볼 수 없다.
주인이 아닌 충암에게 윤언수 역시 그렇게 권 했을 리 없다고 보여 진다.
이런 자료들에 의거해 보면 고봉정의 첫 주인은 고봉 자신인 충암으로 판단함이 합리적인 생각으로 보인다.
1506년 이전에 고봉에 어떤 인위적 구조물이 존재했었고, 충암이 고봉이란 명칭으로 부르며 자호로 삼아 알려지고 지금까지 전해져 왔음을 보면 고봉에겐 충암이 천리마였던 것이다.
사마천 사기 백이열전에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야 천리를 갈 수 있다”는 말이 있다.
⑤고봉사의 잘못 된 위치와 현판
고봉정사는 건축물이 갖고 있는 자체적인 역사성과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쓴 휘호를 판각한 현판, 능성구씨보갑(綾城具氏譜匣)만으로도 충분히 유적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어 문화재로 보호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봉정사와 나란히 있는 고봉사는 건립의 정당성을 떠나 나름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해도 고봉정사의 독립성을 훼손해 같은 담장 내에 세운 잘못을 지적해야 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문화재 보존 측면에서 대단히 잘 못 된 처사였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고봉정사의 역사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최소한의 문화적 소양이 있었다면 고봉사는 별도의 공간에 세우거나 또는 담장으로 독립성을 가지게 배치하도록 설계한 후 건립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봉정사의 부속건물이 아닌 별개 건축물인 고봉사는 별도의 안내문을 통해 건립과정을 설명해 놓아야 한다.
고봉사 건립의 정당성에 의문을 갖는 것과는 별개로 근본도 없는 건축물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별도의 안내문을 통해 고봉사 건물에 역사성을 부여할 수 있고, 건립한 뜻을 정확하게 알릴 수 있는 길이며 잘못된 문화재 보존에 대한 교훈으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화재 보존 관점에서 발생된 부실함을 극복해 가는 것은 문화재에 대한 올바른 관리밖에 없다.
고봉(孤峯)을 고봉(孤峰)으로 쓴 현판이 고증을 소홀히 해서 발생된 단순한 오기인지 또는 다른 문제로 발생된 잘못인지 알 수 없고, 三波沿溜峰(삼파연류봉)이라 해놓고 삼파연루봉이라 읽게 안내된 것은 지적하기에도 민망한 일이다.
1981년에 건립된 고봉사 현판은 원정의 후손인 최규하(崔圭夏) 전 대통령이 쓴 것이라 하니 더욱 씁쓸한 생각이 든다. (다음호에 이어짐)
/김병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