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집안이 가지고 있는 “연예인 끼”

보은예술극회 김주오 최초창단

1997-04-05     보은신문
◇ 이관모편집인 : 고향 보은에는 자주 내려가는가?

◆ 김주오 : 명절에 성묘를 가거나 봄에 삼산초등학교 33회 동창회가 열릴 때면 보은에 간다. 보은에 있는 동창생 중에는 하봉석과 박성흠씨가 있다. 아주 오래된 친구들이다.

◇ 이 : 어떤 계기로 연예인 생활을 시작하였는가.

◆ 김 : 6.25 사변 전에 보은에 예술극회가 있었다. 김학수씨 양금오, 김호영씨 등이 주축이 되어 활동하였다. 유치진씨 작품과 『춘향전』『대추나무』등 유명한 작품을 많이 했다. 그리고 밴드도 구성되어 있어 이에 많은 관심이 있어 주의 깊게 보고 있던 시절이 중학교 2학년이다.

각 면까지 순회하며 다녔는데 6.25후에는 이 예술극회를 물려 받았고, 수복 후에 873부대가 충북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고등학교 3학년 시절 군소속으로서 선공봉작대를 조직하여 예술활동을 시작하였다. 이것은 충북 일원에 걸쳐 위문공연을 하는 것은 물론 일반인에게도 공개하였다. 무조건 이 일이 좋아서 시작한 것이 연예인 활동을 하게 된 인연이 되었다.

◇ 이 : 형제가 모두끼가 있어 선천적인 소질이 있었는데…

◆ 김 : 주흥이란 이름자를 쓴 분이 큰 형님인데 청주상고에서 밴드부장으로 트럼펫을 연주하였고, 「춘향전」이란 작품에서 연출과 함께 악기를 직접 연주하였다. 주일은 둘째 형님인데 검사 출신이었고 둘째 형님이 극단 「신협」과 잘 알고 있었는데 연출은 김주일, 주연은 김주태, 나는 단역을 비롯한 여러 가지 역할을 했다. 큰 형님이 마찌마하리 즉, 밴드를 형제들이 끼를 발휘하여 보은에서 대단한 선풍을 일으켰었다.

◇ 이 : 과거 연예 활동시절의 얘기를 해 달라.

◆ 김 : 53년도에 극단 『아랑』에 들어가서 활약하다가 극단 『신청년』으로 옮기고 극단 『민극』에서 『돈』이란 작품으로 연극생활은 끝을 냈다. 그 다음은 영화로 진출하게 되었는데 첫 출연 『벼락감투』에서 변기중, 이룡, 김세라등이 함께 출연했다. 대감 역할을 했고 단역배우로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김석훈이와 조연을 맡아 여러 작품을 했고, 이대엽과 『경상도 사나이』를 주연으로 데뷔했으나 흥행에 실패를 하여 주저앉고 말았다. 조연 단역으로 수십편의 작품을 했으나, 텔레비전이 들어서고 부터는 더욱 어려운 생활의 연속이었다. 개런티는 부도가 나기 일쑤였고 생활에 어려움이 많아 가족들 고생을 시켰다. 4.19의거가 나던 해에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오향영화사에서 기록을 보고 있던 김복인씨와 연애 끝에 결혼을 하였다.

부인은 서울대에 다니면서 영화사에서 아르바이트 하다가 나와 마음이 통해 결혼을 했다. 나는 배제고등보통학교를 다녔고, 국민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69년에는 제작자로서 『구봉서인생출발』이라는 영화를 제작하였으나 결국 망하고서 성남으로 이사해 고생을 많이 하였다. 이때부터는 연예계 생활하고는 거리가 먼 복덕방을 차려 놓고 구멍가게를 했다 한 10여년간 운영했다.

◇ 이 : 최근 가수겸 탤런트인 아들 김민종시가 활발한 활동을 벌여 최고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민종씨는 언제 태어났고 어떻게 해서 연예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인가?

◆ 김 : 민종이는 71년 성남에서 제일 고생을 하고 있을 때에 낳았다. 부동산조치법 때문에 사업이 또다시 실패를 거듭하게 되어 다시 서울로 이사를 하였다. 79년에 서울에 와서 강남구 신사동에서 조그만 식당을 차려 놓고 집사람과 같이 하고 있었는데 이때가 민종이는 안양예고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민종이는 뒷바라지를 제대로 해주지 못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여의도에 연기학원에 혼자 다니면서 나름대로의 배우의 꿈을 키워 왔다.

그래도 별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는데 어느날 식당으로 후배인 석래명 감독이 우연히 찾아와 술을 함께 하면서 작품 중에 『아스팔트』를 계획하고 있다고 해 민종이를 석감독에게 소개하였다. 석감독이 마스크가 이국적이라면서 역할이 큰 것은 아니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에 척 출연을 시켜 줘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속편으로 역할을 키워서 나왔는데 흥행에서는 좋지 못했다.

그 다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영화에 캐스팅 되었다. 갑자기 김보성이와 주연이 바뀌어 민종이가 실망도 많이 했지만 이를 극복하고 조연으로 나와서 대 히트를 치게 되었다. 그 다음서부터는 승승장구하는데 텔레비전에서 프로포즈가 많이 들어오게 되었다. 영화의 주제곡을 캐스팅과 동시에 삽입하게 되었고, 이것이 반응이 좋아 가수로 데뷔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 블루』란 그룹을 손지창이와 둘이서 결성하여 활동중에는 나름대로 인기도 많았지만 오랫동안 활동하지는 못했다.

◇ 이 : 요즘 『머나먼 나라』로 인기 상승에 있다. 다음 작품을 기획하고 있는가.

◆ 김 : 머나먼 나라가 2월말로 민종이가 맡은 역할이 죽는 것으로 끝난다. 악당들과 싸우는 바람에 칼에 맞아 죽는 것이다. 이번을 계기로 스타덤에 진입했다고 본다. 워낙 끼가 있어 스스로 잘해 나가고 있다. 최근에 와서 성숙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흡족하다. 간단히 쉬고 다음 작품을 계획할 예정으로 안다.

◇ 이 : 각 언론에 김선생과 아들 민종시를 떳떳하게 보은 출신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 김 : 보은 출신이라는 것을 밝힌 것은 『보은예술단』을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획기적인 것이었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호적도 보은에도 놔두고 있는 것은 가슴 뿌듯하다. 선산이 용천산에 있어 우리 가족은 죽어서도 보은으로 갈 것이다. 민종이는 2남2녀중에 막내인데 장남은 태권도 국가대표로 활동한 김우종이다.

뒷바라지는 민종이 엄마가 음식에서부터 옷의 코디네이션까지도 해주고 있다. 민종이가 간염B형으로 군대가 면제될 정도로 건강이 좋은 편은 아니다. 지금으로서는 건강이 큰 걱정이다. 앞으로는 다작보다는 선별해서 출연시키고 건강도 체크하겠다. 안쓰러울 정도로 바빴는데 앞으로는 조심스럽게 자기 자신의 시간을 가지려고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년부터는 가수 활동을 재개할 것으로 본다. 금년에는 자숙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나 역시도 나이 먹은 역할이 주어진다면 지금도 배우의 길을 갈 것이다. 요즘에는 분장술이 능수 능란하여 노인 연기자들이 필요 없을 수도 있지만 연륜을 연기로 다 표현해 낼 수는 없지 않은가. 노인역할을 꼭 해보고 싶다.

◇ 이 : 대를 이어서 연기자의 생활을 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다시 태어나도 이 생활을 하겠다고 했는데

◆ 김 : 내 자신이 못 이루었던 점을 아들이 해냈다는 것은 뿌듯하다. 다시 태어나도 연기자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대에서 관객과 함께 했을 때 관객의 호응이 좋은 모습 때의 희열은 잊을 수 없다. 민종이는 앞길이 구만리 같은데 열심히만 한다면 민종이는 대성할 것으로 믿는다. 특히, 성대가 좋아 성대묘사를 잘한다. 강하고 높은 톤만이 좋은 것이 아닌데 민종이는 대성할 가능이 있다.

◇ 이 : 활동시절 별명이 있었는가.

◆ 김 : 이국적으로 생겨 영국신사로 통했다. 미국 영화배우 벤죤슨을 많이 닮았다고 하여 별명이 벤죤슨으로도 통했다.

◇ 이 : 고향 친구들에게 인사말씀을 해달라.

◆ 김 : 자주 못 내려가는 것이 미안하다. 보은에 가도 옛날 친구들이 별로 없어 서먹서먹한데 형님까지 돌아가셔서 못 가는 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조상께도 죄송할 따름이다. 금년 봄에는 사초를 하러 내려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