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세에 대학 입학한 경이의 인물
부산시 남구의회 양한석 부의장
1997-03-29 송진선
◇ 이관모편집인 : 부의장 당선, 대학교 합격, 자랑스런 부산시민 대상 수상까지 경사가 겹쳤다. 소감을 말해달라.
◆ 야한석 남구의회 부의장 : 열심히 노력해온 자신이 인정받은 것이라 개인적으로 상당히 기뻤다. 특히 자랑스런 부산시민 대상은 의정부문에서 수상한 것인데 남구가 수영구와 분구되기 전 남구의회 초대의장을 지내고 2대 후반기에는 부의장을 지내는 것에 대해 초대의장을 지낸 사람이 어떻게 부의장을 지내는가 하는 것을 청년들이 신선하게 받아들인 것 같다. 미국에서는 대통령 지낸 사람이 농사를 짓고 교장을 지낸 사람이 수위를 하고 있는 것 처럼 세계화, 선진화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깨야한다.
◇ 이 : 만학의 나이에 대학에 합격해 전국적으로 화제를 모았다. 도대체 공부를 어떻게 했나.
◆ 양 : 가정형편때문에 중학교에 진학 할 기회를 놓쳤다. 한학을 공부한 것이 고작이었다. 내 의자를 테스트 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란 자기 도전 의식이 강하게 자리잡았었다. 밤잠 못자가며 40여년만에 책을 붙들어 다행히 지난해 고입검정에 합격했고 역시 대입검정에서는 평균 83점을 얻었다. 다들 과외수업을 받는다 학원수강을 한다 했지만 나는 그럴 처지가 못되었다. 동의대 정치학부와 동서대학교 외국어 학부 영문과에 동시합격했다. 앞으로는 젊은 20대들과 50대인 나와의 세대차이 극복이 가장 큰 숙제가 될 것 같다.
◇ 이 : 왜 이 늦은 나이에 대학에 도전했나.
◆ 양 : 80년 들어 각 대학에서 관리자과정을 신설해 부산대 행정 대학원과 경영 대학원, 환경 대학원 등에서 각 관리자 과정을 수료했으며 미국 하버드대까지 연수를 다녀왔다. 대학을 나오지 않았어도 사회활동을 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이왕 정치를 하니까 학술적인 정치를 배워보겠다는 생각이 대학도전의 가장 큰 이유다.
또, 다같이 대학갈 시기를 놓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다시 대학에 도전할 수 있도록 하는데도 도움을 주고 싶었다. 졸업장이나 따고 보자는 식으로 얼굴을 내는 것이 아닌 집념이 약한 청소년들에게 용기를 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이 : 살아가는 생활철학과 종교관은 무엇인가.
◆ 양 :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욕심내지 말고 하나님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말을 항상 되새기며 생활속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원래 목사의 길을 걷겠다는 포부를 갖고있었으나 목사가 아니더라도 봉사할 길은 얼마든지 있다고 판단해 목사로서의 길은 포기하고 장로가 되었다. 부산에 정착해 장로가 된지 내년으로 20년이 된다. 성격의 말씀을 어기지 않고 열심히 살아 자녀들도 건강하게 잘 자라 주었다. 그것이 제일 고맙다.
큰 아들은 서울대학교를 나와 현재샌디에고 주립대학에서 환경분야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다. 둘째 아들은 부산 경성대를 졸업하고 내가 운영하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작은 아들은 방학만 되면 공장에 나와 잡부일을 도맡아 해 학비를 벌면서 학교를 마쳤을 정도로 의지가 강하다. 또 경영자가 되려면 직원들의 어려움을 체험해야 한다는 내 지론으로 둘째 아들에게는 경여수업을 현장에서 가르쳤다. 장차 둘째 아들에게 회사운영을 맡길 생각이다. 막내는 외국어대 3학년이다. 모두가 나의 후원자들이다.
◇ 이 : 초대의장을 지내고 2대후반기의 부의적으로 피선됐다. 욕심이 많은것 같은데 이점에 대해 한 말씀.
◆ 양 : 당초 시의원에 출마하려고 했으나 시의원에는 고향 친구가 출마해 구의회로 방향을 수정했다. 낯설고 물선 객지에서 혈연, 지연, 학연없이 초대의장에 당선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부산지역에서도 주민이나 타 의원들도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다시 2대 후반기에는 부의장이 되자 부산시민들도 역시 실력있는 사람은 다르다고 높이 평가했다. 어떤 위치에서건 일을 열심히 하면 나름대로 평가는 다 되는 것 같다. 다음에는 민선 구청장 선거에도 출마할 생각을 갖고 있다.
◇ 이 : 충청도 사람으로 부사시정에 뛰어든 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어떤 대처가 있었기에 두 번씩 당선이 되었는가.
◆ 양 : 정치할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었다. 그리고 특별한 대처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크리스찬으로서 사회에 봉사해온 것을 주민들이 평가해 준 것 같다. 의장을 지내면서 중소기업이 겪는 어려움을 시정에 반영 해소하려고 구청장출마의사를 굳혔으나 당시에 부산 주민들이 부산시민이 다죽었는가 초대의장도 타향인에게 빼앗기고 구청장 까지 빼앗기면 안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자격요건을 다 갖추었는데도 학력(국졸)을 트집잡아 공천을 못받게 조성되는 수모도 겪었다.
◇ 이 : 고향을 떠나온지 오래되었다. 어떻게 하여 자수성가를 했는가.
◆ 양 : 군대를 부산에서 보냈기 때문에 65년 제대후 고향으로 가지 않고 아예 부산에 정착했다.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남다른 학력, 또 배경이 좋은 것도 아니어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처음부터 한우물만 판다는 생각에 포장업체에 손을 댔다. 성실과 신용, 친절을 재산으로 회사를 운영해갔다. 점차 고객들이 늘고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중소기업 치고는 비교적 탄탄한 회사를 운영해갔다. 점차 고객들이 늘고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중소기업 치고는 비교적 탄탄한 회사를 유지하고 있다.
장사꾼으로 사업을 했으면 벌써 손을 들었을 것이다. 믿음과 사랑, 그리고 인격적으로 종업원들을 대해왔다. 단편적으로 보면 이익보다는 손해일수도 있었으나 장기적으로 모든것이 이익이었다. 그래서 20년이상 30년 기까이 거래하는 고객이 많다.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꾸준히 관리하고 인격적으로 대해 객지에서 성공한 것으로 본다.
◇ 이 : 작금의 경제상태는 최악이다. 운영하고 게신 포장공업도 경기에 민감한데 현재의 경제상황을 얘기해달라.
◆ 양 : 골판지를 생산하는 포장제조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부산도 역시 경제가 불황을 겪고 있어 큰 일이다. 신발, 섬유, 봉제업체가 사양길이어서 우리가 생산하고 있는 골판지 공장재 소비가 줄어 타격을 입고 있다. 판매처를 다양화할 필요성이 생겼다. 그래서 방수가 되는 포장재를 개발, 자동화 시설을 완비하고 농산물과 수산물 포장으로 판매처를 변경, 생산하고 있다. 지금은 국내 뿐만 아니라 러시아 등지로 수출도 하고있다. 포장재 개발 및 생산에 따른 30년이 넘는 노하우와 일본등을 견학해 기술을 축적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현재 우리나라도 외국과 같이 대기업에서 포장재 생산에 달려들어 자금과 물량으로 밀어붙이고 있는데 중소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품질의 고급와 전문성으로 중소기업의 특성을 살려야 최후까지 살아남는다고 본다.
◇ 이 : 고향에 관내 한말씀.
◆ 양 : 고향이 회남면 판장리이다. 대청댐 축조로 수몰되었다. 부산에 정착한 지 30년이 넘어 반 부산사람이 되었으나 판장리는 늘 가슴에 남아있다. 조상의 묘소가 있어서 성묘하기 위해 들리는데 자주는 가지 못한다. 자식들은 부산에서 태어나 회남면 판장리에 대한 기억이 없으나 아버지의 고향이 곧 자식의 고향이라는 생각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선친의 묘를 참배해 고향을 잊지 않도록 가르치고 있다. 어려서 고향을 떠날때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돈을 벌지 않으면 절대로 고향 땅을 밟지 않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은 적도 있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듯 싶다. 좀더 돈을 벌면 고향에 가서 학교를 세우는 것이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