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충암 선생을 보다

삼년산 향토사연구회 문화탐방

2002-12-07     곽주희
제주도에 가서 충암 김정 선생을 만나고 왔다. 그 곳에서 충암 김정 선생은 오현(五賢)의 한사람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그 역사의 흔적들은 세월의 영겁을 뒤로한 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삼년산 향토사연구회(회장 김홍원) 회원들은 지난 1일과 2일 충암(沖菴) 김정(金淨)선생의 발자취를 찾아 제주도로 문화유적 답사를 다녀왔다.

한라일보사 이사 및 논설고문, 제주도 문화재 제1분과위원장, 제주 서복학회 회장인 홍순만씨의 안내를 받으며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제주시 이도1동 제주성지 안에 있는 오현단(五賢壇)이었다.
오현단(五賢壇)은 제주도 기념물 1호로 조선시대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목사 등의 관인(官人)으로 와 민폐제거, 문화발전에 공헌한 다섯 분을 기리기 위해 마련한 제단으로 오현(五賢)은 1520년(종종 15) 유배온 충암 김정선생, 1534년(중종 29) 목사로 부임했던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선생, 1601년(선조 34) 안무사(按撫使)로 왔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선생, 1614년(광해군 6) 유배된 동계(桐溪) 정온(鄭蘊)선생과 1689년(숙종 15) 유배온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이다.

단(壇)은 원래 1578년(선조 11) 판관 조인후(趙仁後)가 가락천(嘉樂泉) 동쪽에 충암 김정선생을 모시는 충암묘를 지은 것이 시초로 1667년(현종 8) 판관 최진남(崔鎭南)이 충암묘를 현 위치로 옮겨지었고, 1682년(숙종 8) 귤림서원으로 사액(賜額)을 받았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귤림서원이 헐린 뒤 1892년(고종 29) 제주 유림 김희정(金羲正)이 중심이 되어 귤림서원 자리에 5현의 뜻을 후세에 기리고자 조두석(俎豆石)을 세우고 제단을 마련해 제사를 지냈다.

이 오현단에는 1856년(철종 7) 판관 홍경섭(洪敬燮)이 새긴 송시열 선생의 ‘증주벽립(曾朱壁立)’마애명과 충암 김정선생과 우암 송시열 선생의 적려유허비가 있다. 우리 일행은 홍선생의 안내로 가락천 물이 솟아나던 샘터로 연중 어떤 가뭄에도 마르는 일이 없으며 제주성내 한복판을 흐르는 산지천의 본류인 가락천 샘터와 1520년(중종 15) 8월 제주에 유배된 충암은 사람들이 빗물(奉天水)을 마시는 것을 보고 이 내팔골에 우물을 파고 깨끗한 물을 마시게 해 사람들이 형조판서를 지낸 충암을 기리기 위해 이 우물을 판서정(判書井)이라 불렀으며, 1940년대 후반에 허물었다는 판서정터를 둘러봤다.

이밖에 충암 김정선생의 적거터와 제주시 삼도 2동에 자리한 사적 제380호인 제주목관아지(濟州牧官衙址)와 보물 제322호로 1448년(세종 30) 안무사 신숙청(辛淑晴)이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창건한 관덕정(觀德亭) 등 충암 김정 선생의 얼과 흔적이 있는 문화유적을 답사했다. 적거터와 판서정, 가락천 등은 지금은 찾아 볼 수 없지만 제주시에서는 역사의 현장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게 내용이 적힌 조그만 표지석을 설치, 찾는 이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또한 제주성지와 제주목관아지를 원형 그대로 복원, 주민과 관광객이 즐겨찾는 사적공원 또는 역사의 공원으로 조성하는 등 선조들의 얼과 정신이 깃든 문화재를 잘 관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