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실을 몸으로 부딪힌 인생
보은읍 풍취리 김홍덕옹(82세)
1997-03-22 보은신문
생활의 궁핍속에서 하루에 가마니 5장을 짜야만 좁쌀로 만든죽이라도 먹을수 있었던 당시 김할아버지에게 징용이라는 시대적 아픔이 찾아왔고 15살때 자신에게 시집온 지금의 할머니를 뒤로 하고 일본 북해로 구리를 생산하는 탄광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끌려온 수백명의 한국청년들이 부산에서 일본으로 가는 연락선을 타기 위해 장사진을 이루었고 먼저 출향한 전라도 사람들을 태운 배가 유엔군의 공격으로 침몰됐다는 소식이 항구를 떠돌아 불안감속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연락선을 타게 됐다. 불안한 마음으로 일본에 도착한 그는 기차로 갈아타기 위해 대기하던중 야심한 틈을 타 일본군들의 눈을 피해 동료와 탈출을 시도하였고 무작정 탈출한 김할아버지와 동료는 3일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채 산속을 헤매다가 마을을 발견하고 찾아간 곳은 한국 사람이 운영하고 있는 공사현장에 은신하게 되어 당시 김할아버지에게 필요한 것은 배불러 먹을 수만 있으면 무슨일이던지 닥치는데로 다했다.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김할아버지는 고향에 자신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전하지는 못하고 서울 형님에게 편지로 자신의 소식을 전하면서 고향 보은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으로 1년6개월을 지냈다. 형님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서울에 도착했으나 막상 고향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위험한 상황속에세도 그는 고향으로 내려왔으나 자신이 징용에서 탈출했다는 사실이 일본 순사들에게 밀고돼 김할아버지를 잡으러온 순사를 뿌리치고 다시 탈출을 시도했다.
여기서 다시 김할아버지는 북만주(길림성)로 향했고 여기서의 생활도 만만치 않았다. 도망자라는 죄책감 때문에 마땅이 할 일도 없던 와중에 김할아버지는 호랑이굴로 들어가기로 결심하고 당시 일본군 대장집에서 잡일을 보면서 고향으로 돌아가기만을 기다렸다. 열심히 일한 보람으로 그는 어느정도 생활의 여유를 찾게 되었지만 고향땅에 두고온 자신의 부인과 5살된 큰아들 생각에 기회만을 엿보며 자신의 환경에 최선을 다했다. 해방되던 해 그는 고향 풍취로 돌아와 남의 땅 2천여평에 다시 농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징용으로 시작해 북만주에서 어려운 생활은 다시 6.25 라는 역사적 사건을 맞이하였고 이속에서도 대한청년단 활동을 하면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다. 시대의 변화와 역사적 현실 앞에 김할아버지의 일생은 한편의 드라마와 같은 삶을 살아왔다. 한국역사의 격동기에 태어나 문민정부라는 역사의 수레바퀴속에서 김할아버지의 인생은 한국역사를 듣는듯한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시대는 변해도 김할아버지의 빈곤했던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다시는 고향을 떠나지 않고 김할아버지의 고향 바람부리 풍취리에 영원히 살겠다는 김할아버지를 보면서 새삼 우리네 고향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