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내려간 배꼽

김완기(외속 장내/ 음악인, 시인)

2002-11-23     보은신문
세상은 아름답고, 살맛나는 삶인데, 그렇지 못한 겉똑똑이들을 보노라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남에게 상처를 주고도 태연한 사람, 상대의 손해는 눈 딱 감고 자기는 절대로 손해를 보지 않는 사람,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 내가 편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아픔이나 불편은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

그런데, 참으로 바보 같은 사람 이야기, 나를 자유롭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20여년 전 여름 상주에서 성인교육이 있어 교육팀의 일원으로 내려간 일이 있다. 상주 기상관측이래 제일 무덥다는 신문보도만큼이나 교육장은 찜통속 같았다. 서울의 한 임원은 준비물을 점검하다가 상주의 대표 이회장에게 강의장에 선풍기를 설치해달라고 요청했다. 이회장은 그러마하고 대답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물건은 오지 않았다. 서울 임원의 독촉에 여전히 ‘예, 되겠지요’하는 느긋한 대답뿐이었다.

같이 준비하며 지켜본 이 회장이 여유가 너무나 신기하여, 의아해 했더니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집안이 어려워 어려서부터 바느질을 배웠는데, 바느질 솜씨가 좋다고 소문이 나서 영광스럽게도 젊은 나이에 대구의 모 중학교 교장이던 이효상(후에 국회의장 지냄)님의 양복을 짓게 되었다.

당시는 대동아전쟁(일본이 일으킨 전쟁) 중인지라 모든 물자가 귀하고 어렵던 시절인데, 운좋게 이교장님은 좋은 외제 양복지 한 벌 감이 생겼던 것이다. 지금이야 양복점에 가서 직접 치수를 재 재단을 하고, 가봉도 하지만, 그 때는 그렇지 않았다. 옷 지을 집에 들어가 문틈으로 보고 몸의 치수를 어림해서 옷을 만들었던 것이다.

드디어 옷이 다 된 날 점심시간에 이 교장님이 점심을 드시러 들어왔다. 사모님은 옷이 다 되었으니 입어보라고 옷을 내 놓았다. 옷을 입히던 사모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애그머니, 이를 어쩌나 웃옷이 짧네요”만든 옷이 어떤가 문틈으로 가슴 조이며 들여다보던 이 회장은 기겁하여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치수를 잘못 어림하여 웃옷이 발랑 들린 것이다.

그 귀한 양복지를 버려놓았으니 이를 어쩐단 말인가. 그런데 다음과 같은 이교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야, 갑자기 내 배꼽이 내려갔나봐”그 순간 무섭게 자기를 억누르던 속박으로부터 해방이 됨을 느꼈다. 하늘을 훨훨 나는 느낌이었다. 인생에 대한 자유의 희열을 맛보았다. 그로부터 소유와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여, 뭐 그리 안달을 하는가? 매일 배꼽을 내려볼 일이다.


필자소개
※ 속리초등학교·보덕중학교·대전사범학교·경희대 교육대학원 졸업
시집 ‘구름 그리고 그림자’/ 해동문인협회부회장역임/ 제1회 해동문학상 수상/ 한국관악협회 자문위원/ 한국관악협회회장역임/ 대한민국관악상 수상

<정이품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