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찌개와 향기

김완기(외속 장안/시인)

2002-10-26     보은신문
사람에게서의 향기는 무엇일까? 좋은 향기를 내기 위해 향수전문매점도 생겼지만 그런 물리적인 향기야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마는 거.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짙어지고, 그리워지는 게 사람의 속에서 나는 향기가 아닐까 한다.

6·25전쟁 때 나는 초등학생이었는데 출생지인 대전에서 4학년 마치고 고향인 보은 장안으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는 자식교육을 위해 대전으로 나가시어 사셨으나 학자에게 사업이란 맞지 않았을 터였기에 하는 일마다 재산을 축내다가 드디어 전쟁이 나고는 빈손이 되었던 것이다. 빈손으로 돌아온 고향엔 옛날 두고 간 집만 있을 뿐 수입원이 없었으니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전학을 하자마자 바로 반장 선거가 있었는데, 이변이 일어났다.그 동안 줄곧 반장을 도맡아 해오던 H 대신 뜻밖에도 내가 반장에 당선되고, 그는 부반장이 된 것이다. 도시에서 산 탓에 얼굴이 뽀야니까 호기심 많은 여학생들이 나를 찍어준 게 아닐까 싶다.(성차별적인 생각인지는 모르나) H는 공부도 잘 하고, 리더십도 있고, 씨름도 잘 하고, 성격도 좋고,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그런데, 졸지에 반장 자리를 내주었으니, 그것도 어디서 굴러온지도 모르는 돌에 발부리를 채인 격이니 얼마나 서운하고, 괘씸하고, 미웠을까? 그런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나를 도와주고 아꼈다. 서운함이나 미움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너그럽고, 큰 친구였다.

그 때 우리는 잘도 어울려 놀러 다녔는데, 정신 없이 놀다가 친구 집에서 저녁을 얻어먹는 일이 많았다. H의 어머님이 차려오시는 상에는 수북이 담은 보리밥에 된장찌개와 반찬이 그득했다. 친구들은 밥 한 그릇 뚝딱 해치웠지만 나는 양이 적어서 그 밥을 반정도 밖에 먹을 수가 없었다. 내가 수저를 놓을라치면 H는 어김없이 된장찌개를 내 남은 밥에 붓고는 이렇게 남긴 밥을 누가 먹느냐며 억지로 먹였다.

양식이 귀한 시절인지라 그렇게 밥을 남길 수가 없어 미련스레 그 밥을 다 먹곤했었다. 그런데 어려운 살림에 좁쌀죽이나 겨우 먹으며, 밥 한끼 제대로 먹지 못하는 나를 배불리 먹이려는 친구의 따뜻한 마음이었음을 깨달은 것은 어른이 되고 나서였다.

어려서부터 남에게 져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는 불쌍한 부모, 그래서 남이 앞서는 것을 참지 못하는 불행한 아이들을 볼 때면, 내게 너그러움과 사랑 그리고, 정을 가르쳐준 친구 H가 그리워진다.
60이 넘도록 그의 향기는 더욱 짙어만 간다. 고향을 지키는 그는 고향을 떠난 모든 친구들의 정신적인 지주이다.

〈필자소개〉
·61세이며 속리초등학교, 보덕중학교를 졸업.
·현재 서울 리라 초등학교 교감으로 재직 중.
·시집 ‘구름 그리고 그림자’를 발표한 시인이며 지휘자로도 이름이 높다.

<정이품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