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겨운 얼굴, 범부채

속리산 야생화〈5〉범부채

2002-08-24     보은신문
20대 중반, 직장동료 중에는 눈이 유난히 빛나는 여직원이 있었다. 뾰족하고 굽이 높은 하이힐을 안정감있게 신고 다녀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주던 그녀는 꽤나 세련된 아가씨였다고 기억된다. 그런 그녀가 늘 얼굴에 두터운 분을 바르고 다녔다. 그 때나 지금이나 자연스러운 걸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생각하는 나는 그녀의 지나치게 짙은 화장이 옥의 티처럼 마음에 걸렸다. 말은 하지 못했지만 '화장이 조금만 엷었으면......' 속으로 혼잣말을 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직장에 지각을 하고야 말았다. 무슨 일로 늦었는지 지금, 기억 나지 않지만 얼굴에 화장기가 하나도 없었던 게 생각난다. 헐레벌떡 나타난 그 맨 얼굴의 정겨움이란. 머쓱함으로 당황해하던 그녀와는 달리 비로소 가면이 벗겨진 실체를 볼 수 있었던 나는 그제야 진짜 그녀를 만난 듯 반가웠다.

그녀가 당혹스러워 하는 게 당연하기라도 하다는 듯, 그녀의 맨 얼굴 전체는 죽은깨가 빼곡히 자리잡고 있어 화장이 짙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지만 내게는 구름 걷힌 후의 말간 하늘처럼 오히려 아름다웠다. 소박함이 배어나는 얼굴은 더 정겹게 느껴지기까지 해서 쓸데없이 많은 말을 그녀에게 붙여 보기도 했다.

계속 그러고 다녔으면 하는 나의 바람과는 달리 그녀가 직장을 그만두는 그날까지 다시 맨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두텁게 발라진 화장품의 베일 속으로 까만 죽은깨는 숨어버렸고, 소박함이라든가 정겨움이 사라진 얼굴은 도시처녀의 세련됨만이 남아있을 뿐.

세월이 한참 흐른 후, 범부채꽃이 활짝 핀 것을 보고는 나의 20대 때 그녀를 떠올렸다. 황적색 꽃잎에 짙은 반점이 그녀의 죽은깨 만큼이나 송송 박혀있어 그날의 그녀처럼 정겹게 느껴졌던 것이다. 범부채는 산의 초지에서 자라는 다년초 꽃이다. 곧추 선 줄기에 부채살처럼 퍼지는 잎은 폭이 2∼4센티로 좁은 편이지만 길이는 25∼50센티로 비교적 길다. 잎 끝은 뾰족하다. 꽃은 8월에서 9월경에 피고, 열매는 쥐똥처럼 검고 둥근 것이 윤기가 돌아 아름답다.

대부분의 한국 야생화가 그렇듯 화려하지 않지만 소박하고 정겨움이 그대로 묻어있어서 쉽게 스쳐 지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지나온 길을 천천히 돌아보게 만드는, 옆 책상의 동료 같은 범부채꽃을 감상하러 주말을 기다려 산을 올라야겠다.

<제공 : 속리산 관리사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