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교육자의 자세로 참교육 실현"

보은농공고 김성장 교사

1998-12-05     보은신문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보은농공고를 찾았다. 사전 약속도 하지 않고 무작정 만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교무실로 향하는데 우연이었을까 문을 열고 나오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보은농공고 국어과 김성장(39)교사. 지난해 일이었다. 인근 옥천군에 소재한 청산중학교 재직당시 보충수업 거부와 보충수업의 난맥상을 지역신문에 발표한 것이 화근이 되어 교육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주인공이다. 김교사는 보충수업을 하지 않는 대신 지역민들을 위한 「청소년 수련방」을 개설해 무료로 청소년에게는 공부를 가르치고 지역민들에게는 서예를 가르치며 보충수업을 거부할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입장을 묵언으로 항변하고 있었다.

이러한 김교사의 행동은 옥천교육청으로 부터 견책이라는 징계와 납득할 수 없는 인사발령이 단행되었고 자신의 정당성을 보여주기 위해 부인 김필선씨(38. 경북 화령중 교사), 아들 도담(7)·도솔(4)이와 함께 도교육청앞에서 텐트를 치고 3일간의 농성에 들어갔다. 결국 김씨는 아내와 자식이 있는 곳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한다는 조건에 합의하고 단양으로 발령을 받았고 최근 보은농공고는 다시 돌아와 옥천 청산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지금도 김교사는 "교육개혁은 보충수업 문제를 간과한 채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된다" 며 "학생 스스로 체감적으로 느끼는 개혁이 개혁이고 보충수업이라는 장치를 통해 물리적으로 학생들을 억제해 놓는 한개혁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

기존의 틀속에서는 어떠한 교육개혁이 올 수 없다는 김교사는 「모둠토의」라는 교사와 학생이 하나가 돼 서로 하나의 문제를 토의하는 방식을 새롭게 도입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학생들이 능동적이고 창조적인사고 방식을 가지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김교사의 생활태도는 그의 이력으로도 말해 주고 있다. 70년대 당시 잘나간다는 금오공고를 졸업하고 군대에서 5년간 생활한 후 이 공장 저 공장을 전전하며 일을 하던 김교사는 스물 여섯이 돼서야 글에 대한 열망으로 대학진학을 준비했다. 27살때 85학번으로 충북대국어교육과에 입학한 김교사는 「창문학 동인회」 회원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글을 쓰면서 고착화된 사고방식을 버리고 문학에 대한 열려있는 사고방식을 키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첫 시집 「소로 다른 두자리」를 내고 자신이 교육현장에서 채득한 경험을 토대로 엮은 교육방식서 『살아있는 모둠토의 수업방법 10가지』를 「내일을 여는책」에서 발간했다. 김교사의 안주하지 않는 생활태도는 많은 습작과 서예활동을 통해 교사로서의 자질향상을 높이고 있으며 참교육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중에 있다. 김교사는 미술교사인 아내와 함게 도자기 굽는 일을 벌이고 있다. 김교사가 계획하고 있는 참교육은 학교밖의 학교를 세워도자기 굽는 방법도 가르치고 서예도 가르치고 글쓰는 것도 가르치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방법도 가르치는 그런 학교를 만들고 으 학교 이름을 가칭 예술교육원으로 지었다.

김교사는 이러한 참교육을 실현하기 위해 언제가는 이뤄야 할 계획이고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부단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으며 이러한 꿈을 실현하기 위한 적지로 보은을 생각하고 있다. 김교사의 삶의 태도는 평범하기를 거부하기 보다는 잘못된 기존의 관례를 수용하지 못하는 개혁의 자세로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한 평범한 행동으로 받아들여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참교육 실현을 위하 전교조가 합법화 되고 보충수업을 폐지한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어도 김교사의 가슴에는 아직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가 있다. 이 빈자리는 바로 그가 생각하는 참교육일 것이다. 6교시 수업이 끝난 후 몇명의 학생들이 김교사에게 달려왔다. 가훈을 써 주겠다는 김교사의 제안에 잘 알지 못하는 한자이지만 나름대로 고민한 흔적이 있는 학생들의 쪽지를 펼치며 열과 성의를 다해 가훈을 써주는 모습에서 스승과 제자의 벽을 허물고자 하는 김교사의 노력이 잠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