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 시대

<385>

2019-03-28     최동철

 말이 필요 없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물론 현생인류가 생각만으로 소통하는 신들이나 텔레파시로 묻고 답하는 외계인 수준(?) 차원에 들어섰다는 정도의 의미는 아니다. 얼마 전까지에 비해 과학의 발전에 따라 말을 하지 않아도 일상생활을 영위 할 수 있는 수준을 말한다.

 이웃 독거노인들 대부분은 침침한 방안에서 거의 온종일 텔레비전만 본다. 수십 개 방송이 나오는 다채널이니 찾는 이가 없어 입 한번 열지 않았어도 그뿐이다. 예전처럼 돈 받으러 오는 이도 없다. 자동이체 때문이다. 며칠 간 혼잣말 이외에는 말을 해본 적이 없을 정도다.

 이젠 필수품이다시피 한 ‘스마트 폰’에 거의 중독되다시피 됐다. 출퇴근, 통학 때건 틈만 나면 수시로 액정화면에 몰입한다. 주위상황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친구 등 누군가와 같이 동행해도 마찬가지다. 일행들 모두 각자다. 대화를 입으로 하지 않는다.

 문자메시지로 한다. 카카오톡의 그룹채팅방에 한 번 초대되면 탈출할 수 없다는 ‘카톡감옥’이란 말처럼 스마트 폰 메신저 등이 대화창구다. 작건 크건 모임이 구성되면 페이스북 이든 뭐든 채팅방부터 개설한다. 그리고는 입이 아닌 손과 눈으로 의견을 나눈다.

 장거리 버스 사전예약도 인터넷으로 한다. 터미널에 가도 기계에서 표를 구입하는 게 더 편하다. 버스를 타건 지하철을 타건 교통이나 신용카드만 있으면 말 한마디 안 해도 만사 오케이다. 도시에선 편의점은 물론 식당에서 조차도 무인기계 앞에서 모든 게 이루어진다.

 허기야 말하지 않고 사는 게 더 수준 높은 삶의 형태일 수도 있다. 불가에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 죄업을 짓지 않고 스스로를 정화하는 ‘묵언수행’도 있다. 묵언함으로써 자신과 자연의 이치를 깨닫게 하는 수단이 된다.

 프랑스에 본원을 둔 가톨릭의 카르투시오회는 침묵과 고독 속에서 독거생활로 수행을 하는 수도회로 유명하다. 한마디 대사조차 없으나 전혀 지루하지 않게 3시간의 시선을 뺏는 다큐멘터리 영화 ‘위대한 침묵’의 바로 그 수도회다.

 경북 상주시 모동면에 있는 카르투시오수도원과 보은군 산외면에 있는 카르투시오수녀원 역시 알프스 산중의 수도원과 같은 규칙의 엄하고 혹독한 침묵 수행을 한다. 묵언하고 고독함으로써 결국 자신마저 소유하지 않게 되어 자기 증여와 헌신을 완전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의 정서는 상대방과 대화를 통해야 비로소 감정의 소통을 할 수 있다. 첨단과학의 밀착화로 사라져 가는 말이 사람들에게는 점점 고통을 안겨줄 수밖에 없다. 이웃들과 반갑게 얼굴을 보며 나누는 인사 한마디가 우울과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고령화 시대, 가장 멀리해야 할 것이 결국 무언이다. 다함께 대화하는 세상을 만들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