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기다리는 이유

2019-02-14     홍근옥 (회인해바라기작은도서관)

 거실 난로 위에서 집안 전체를 내려 보며 당당하게 앉아 있는 유리주전자. 그 안에는 잘 덖어진 무차가 진한 붉은 색을 띄면서 난로의 은근한 열로 우려지고 있다. 아무 때나 마셔도 부담 없이 입에 착 감기는 달착지근하면서도 구수한 무차. 사실은 그냥 무가 아니라 과일 무, 혹은 수박 무로 불리는 녀석이다. 일반 무에 비해서 당도가 높고 색깔이 곱기에 가을에 심어 김장철에 뽑아 이걸 차로 덖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차로 변신시킨 녀석이다. 맛도 좋지만 차를 핑계로 자주 수분을 보충할 수도 있고 거기에 무가 폐기를 돋워 준다고 하니 건조한 겨울철 차로 이만한 게 없다. 그런데 겨우내 우리 부부의 사랑을 받고 있는 수박 무차는 사실 큰 돈 들이지 않고 약간의 수고만으로 직접 만든 녀석이다.
 말이 나온 김에 수박 무차를 만드는 나만의 방법을 공개해 본다. 우선 무을 잘 씻어서 무말랭이 크기로 씻어 가을 햇살에 이삼일 쯤 말린다. 그게 귀찮다면 그냥 건조기에 하룻밤 말려도 좋다. 완전히 마르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수분이 걷힌 상태라면 관계없다. 이걸 두꺼운 프라이 팬이나 무쇠 솥에서 두꺼운 장갑을 끼고 중불에 뒤적거리며 서너 차례 덖고 식힌다. 마지막에는 약간 갈색을 띌 때까지 강불에 덖어준다. 이제는 적당한 유리병이나 비닐봉지에 넣고 너 댓 개씩 꺼내어 우려 마시기만 하면 된다. 귀찮을 것 같지만 실제로 해보면 별거 아닌데다가 내가 직접 만들어서 마시는 일이 제법 재미지다.
 무차만이 아니다. 나는 웬만하면 내가 스스로 만들어 먹거나, 만들어 사용하려고 노력한다. 겨울 밑반찬은 물론이고 커튼도 식탁보도 손수 자르고 바느질하고 수를 놓는다. 남편은 서툰 솜씨로 테이블과 소품들을 만든다. 어떤 것들은 인터넷에서 완제품을 사는 것보다 재료비가 더 드는 경우도 있지만 스스로 만든 물건이 훨씬 더 만족스러운 데다가 만드는 과정이 일종의 놀이이기 때문이다. 이걸 깨달은 것은 십여 년 전, 네팔 여행에서였다.
 어쩌다가 네팔의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간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눈부신 설산보다 내 눈을 끄는 것은 가난하지만 행복한 표정의 사람들이었다. 춥고 먹을 것도 변변찮은 히말라야의 산촌마을, 거의 고립되다시피 한 상태에서 마을사람들끼리만 어울려 사는 그들은 한 결 같이 부족함 없이 행복한 표정이었고 손으로는 항상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아낙들은 실패 같은 것을 돌리면서 야크 털로 실을 잣거나 베틀로 천을 짜고 있었고 남정네들은 흙이나 나무 등으로 이런 저런 농기구들은 물론이고 수레바퀴까지 깎고 있었다. 공장이나 전문가가 만든 게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자연에서 구한 것들이니 투박하기 그지없는 도구들, 그러나 굳이 남과 비교할 필요가 없이 각자 솜씨로 만들어 쓰면 되니 가난을 느낄 이유가 없을 것이다. 반면 문명사회에 사는 우리는 넘치는 물건 속에서도 불행하기 십상이다. 물건을 사려면 돈을 벌어야하고 더 좋은 물건을 사려면 더 많은 돈을 벌어야하는데 어디 돈이 그리 호락호락 벌리는 녀석인가, 결국 사람들의 가난과 불행의 시작은 물건을 돈을 주고 사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단순한 논리가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
 그러나 이런 엉성한 논리로 소비를 유혹하는 수많은 물건들을 뿌리치는 것은 쉽지 않다. 마트에 가면 사고 싶은 것도 많고 홈쇼핑에는 싸고 질 좋은 물건들이 넘쳐난다. 차만 해도 돈 주면 맛있고 폼 나는 보이차며 우롱차며 전문가가 만든 각종 차들을 손쉽게 구할 수 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결국은 달착지근한 사이다보다는 우물에서 직접 떠 마시는 냉수가 건강에 더 좋다고 스스로를 달래며 참는 수밖에.
 입춘도 지났으니 얼마 있으면 봄이 올 것이다. 내가 봄을 기다리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고욤잎차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밭 둑, 감나무가 죽은 자리에 쓸모없이 삐죽삐죽 나온 고욤나무 잎으로 차를 덖어보니 감잎이나 뽕잎 차와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달고 맛있다. 겨우내 수박무차를 마셨으니 봄이면 새로운 고욤잎차로 폼 나게 호강을 누려 볼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