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 밤의 꿈

2018-08-30     박태린 (보은전통시장 음악방송DJ)

8월초 읍내는, 폭염으로 인한 열대야로 푹푹 삶아지고 있는데, 8월 3일부터 8일까지 나인벨리 계곡에서는 밤하늘에서 내려와 휘감기는 서늘한 바람이, 낮에 느끼던 열기의 고통을 까맣게 잊게 해 주었다. <쥬쥬마&리즈마> 음악제가 열리는 나인벨리 계곡의 야외무대에서는, 점잖은 콘드라베이스가 갑자기 경쾌한 피치카토로 색깔을 바꾸어 어깨를 들썩이게 하고, 발랄하고 경쾌하면서도 매력적인 선율로 모차르트의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뮤직>이 싱싱하게 터져 나오고, 비발디의 <여름>이 바이올린 선율로 폭풍처럼 몰아쳤다. 이곳이 정녕 내 고향 보은에서 일어나는 일이란 말인가?
 북한 김정은의 요청으로 노래했다는 최진희씨의 <뒤늦은 후회>라던지 <사랑의 미로>같은 노래는 전통시장에서도 종종 내보내는 레퍼토리인데, 클래식과 가요의 라이브를 온 몸으로 들을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준, 제 1회 <쥬쥬베&리즈마> 국제 음악제가 보은에서 개최 되었음에 감사했다. 자유를 찾아 소련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러시아인 호로비츠는 음악가로서 모든 것을 이루었지만, 마지막 꿈이었던 고국 소련에서의 연주는 정치적으로 당연히 불가능하다고 여겼는데, 호로비츠가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엔 1986년 기적적으로 호로비츠의 소련행이 허가된다. 여든넷의 노인이 되어버린 그는 60년 만에 오랜 세월동안 그를 기다린 고국의 청중들 앞에서, 독일 작곡가 슈만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작곡했다고 알려진 어린이의 정경 중 <트로이메라이.꿈>을 연주 한다. 꿈이란 이루어진다는 것이 확실하다는 증거라고 해도 좋겠지.
 유튜브의 동영상을 보면 그 연주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반백의 노인도 있는데, 나인벨리 포레스트에서 열린 <쥬쥬베&리즈마 국제 음악제>를 보면서 동기는 틀리지만 나도 그런 감격스런 마음에 젖을 수 있었다. 큰 문화행사를 기획하고 소화할 만큼 보은군이 문화적으로 성숙되었기 때문에, 외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보은을 찾아 나인벨리 계곡에 그들의 예술혼을 마음껏 심어 놓을 수 있었을 것이기에....
 6일간의 행사 중 세쨋날 MC를 맡았던 김승수씨는 말하길, <한 여름날 뜨거운 커피를 마셔도 가슴 한 켠이 시려 오는 것, 바로 중년이다> 라고 했는데, 나인벨리 야외무대앞에 모였던 수많은 중년들은, 여름 한 낮의 열탕에도 시렸던 가슴이 제대로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았을까?ㅋ~!
 칠흑처럼 어두웠던 나인벨리 밤하늘의 별자리를 들여다 보며 <나의 별자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 이라는 매력적인 제목이 붙은 천문학 시간도 있었는데, 아쉽게도 참석하지 못해 내년 음악제를 기약해 본다. 미련으로 남은 마음은 오래 전 태국의 치앙마이 트레킹 추억을 떠 올렸다. 영국인 여대생 두 명, 일본인 남자 한 명, 한국인 네 명이 한 조였는데, 한국의 음력 설 15일 전의 치앙마이 하늘에는 적도 근처답게, 주먹만큼 큰 별들이 광채를 뽐내며 모닥불 곁에 둘러앉은 일행의 머리위로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 위협적으로 떠 있었다.
 그때 우리들이 중구난방( (衆口難防)으로 쏟아내는 별에 대한 감탄을 가만히 듣고 있던 한국인 물리교사 한 분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저 빛나는 별은 어쩌면 아주 오래 전 우주에서 사라지고, 몇 광년이 지나 그 빛만 지구에 도착한 것일 수도 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에 우리들은, 물리학과 종교의 관계는 어디까지인가에 대해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이 있다. 내년 제 2회 <쥬쥬베&리즈마>음악제에는 나인벨리 천문대 망원경속으로 들어와, 제 무게에 못 이겨 떨어져 내릴 듯 커다란 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꿈같은 천체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지?
 어린 시절, 보은 읍내 영화관에 역도산 레슬링 선수의 다큐영화가 상영되었었는데 아버지는 예닐곱 살인 필자를 등에 업으시고 보은중학교 뒤편 공동묘지 근처 꼬부랑길을 걸어 보은극장엘 가셨다.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늦은 여름 밤, 아버지 등에 업혀 올려다 본 검푸른 하늘에 흐르던 꿈결 같은 은하수. 이젠 해마다 여름이면, 나인벨리 깊은 계곡의 국제 음악제를 찾는 이들에게 <쥬쥬마&리즈마>는, 잊지 못할 <한 여름 밤의 꿈>을 선사하게 될 것이다.
 이로 인해, 음악을 향한 꿈을 키우는 학생들에게는 크게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되고, 대추와, 음악과, 하늘의 별자리와, 속리산까지 합친 문화지역으로 보은군은, 별처럼 빛나는 모습으로 세계인의 시선을  받을 수 있게 되기를 진정 고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