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송인성, 진정 그가 그립다

보은의 향토문화, 독립투사 항일활동 발굴의 숨은 공로자

2018-08-23     이주용 ( 보은읍 어암리 출신, 글그림작가)

 우리 보은군지에 수록된 항일 독립유공자는 모두 26명이다. 이들은 동학농민혁명부터 해방 전까지 활동한 분들로 크게 두 시기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동학기인 1894년부터 1910년 한일합방까지이고, 또 하나는 일제강점기인 1910년부터 1945년까지다. 이번에 보은의 향토문화와 항일 독립투사 발굴로 보은발전을 위해 활동하다 먼저가신 아리랑 송인성 선생을 그리워하는 독자의 글을 2회에 거쳐 게재한다.  <편집자 주>
 

2018년 올여름 기록적인 더위는 우리 모두를 힘들게 하고 있다.
100년 만의 더위라는 것은 100여 년 전에 이 못지않은 더위가 이 땅에 있었다는 뜻이다.
일제의 폭압에 숨막힌 민족에게 이런 무지막지한 폭염까지 덮쳤다니...
8월, 광복절이 들어 있는 달이다. 우리민족이 식민지 백성의 질곡을 벗고 자유를 얻은 감격이 들끓던 1945년의 광복절!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이 땅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이 본격화되어 우리민족의 숨통을 옥죄어 들어오고 있던 시기였다.
1919년 초봄, 고종의 인산에 보은의 마을들에서는 대표를 뽑아 국장에 참여하고자 서울로 올라갔다. 물론, 보은의 일본 행정당국의 매서운 감시의 눈초리를 피한 은밀한 행보였다.
이들은, 고종의 장례식이 끝나고도 한 동안 서울에 머물며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3월이 되자마자 경성의 온 천지가 독립만세운동의 함성과 열기로 들끓는 것이었다.
3.1 만세운동의 한복판에서 그 의미와 소중한 가치를 온 몸으로 체득한 보은의 대표들은 고향으로 돌아와 뒤늦게나마 독립만세운동을 펼치기로 했다.
보은의 조용한 농촌마을에 이러한 의식이 있을리 만무하였으나 이들 선각자들은 뜻을 맞출 수 있는 사람들을 열심히 설득하는데 열중했다.
드디어, 4월 초부터 보은의 여러 마을 뒤 산에서는 횃불과 사람들의 함성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낮에는 열심히 농사짓고 밤에는 산봉우리에 올라 자주독립과 일제배격의 구호를 피를 토하도록 외쳐댔다. “대한독립 만세!”라고.
놀란 일제치하 보은경찰서의 권몽둥이, 강영원 등 악질 형사들은 마을마다 돌면서 만세운동의 주도자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내북면 서지리, 봉황리의 윤정훈, 석성국, 김정환, 구열조, 안민순, 송덕빈, 최용문, 이인하, 이준영, 김용섭, 이창선 의사 등 10여 분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과 재판을 거쳐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그 후 일본제국주의 침탈과 억압은 더욱 심화됐고 이분들과 그 후손들은 더 없는 고통과 수모, 압박을 겪어야 했기 때문에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은 선조들의 모든 것을 꽁꽁 감추고 쉬쉬하며 안타깝게 살아야 했다.
해방이 되고서도 좌우 이념대립 속에서 군부와 민주세력, 보수와 진보세력의 계속되는 싸움으로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공적들은 꺼내들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지하에 잠들어 있었다.
선친들이 차츰 돌아가시면서 후손들마저도 그 사실을 까맣게 잊었거나 귓등으로 들어 넘기게 된 것이 그동안의 현실이었다.
보은지역 독립유공자의 후손들마저도 자랑스러운 선조들의 행적을 모르고 핍박을 피해 외지로 나가 70년이 넘도록 숨어 살다보니 세상에 드러날 수가 없었다.
자손들이 선조들의 공적과 역사를 현실화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을 해낸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송인성(宋仁成)이라는 분이다.
 그는 보은읍 죽전리에 살면서 우리의 아리랑 문화를 연구했다. 그가 아리랑을 얼마나 사랑하고 몰두했으면 그는 자신의 호도 아리랑(我理郞)으로 지어 사용했다.
그는 1991년 봄 보은신문에 4차례로 자신이 발굴한 독립유공자의 행적과 사연을 연재했다.
부제목은 ‘내 고향 독립운동사’였고 주제목은  ‘아향의곡(我鄕義哭)’이었다.
 '우리 고향의 의로운 넋을 눈물로 기린다'는 뜻이었다.
기미년 3.1운동 당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한 많은 평생을 바친 내 고향 인물 10인의 이야기였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 개인연구가의 몸으로 그분들이 생존해 계시던 지역의 숨어있는 모든 기록을 뒤지고 정부부처를 찾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하고, 관련자들을 찾아내 인터뷰하는 등 그 노고를 생각하면 보통 어려웠던 일이 아닐텐데도 송인성 선생은 마지막까지 10분을 찾아 내 한 분 한 분을 자세히 기록해 ‘보은신문’을 통해 세상에 알리고 보훈처에 등록시켜 포상과 수훈도 이루어지게 했다.
 그러던 그분은 1994년 8월 불과 56세를 일기로 우리의 곁을 떠났다. 벌써 24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분은 우리 것의 소중함을 진정으로 아는 분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리랑 연구에도 매진해  구전으로 전해오는 보은 아리랑을 백방으로 채록해 자료로 남기는 공적을 쌓기도 했다.
 송인성 선생의 향토문화 발굴 노력은 KBS방송에 방송되고 각종 신문에도 소개됐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능력도 인정받아 국사편찬위원과 보은군지편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아! 아리랑 송인성 선생,  그가 진정 그립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