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오르며
김영애(보은삼산, 여백문학회원)
1998-01-24 보은신문
그래도 저수지 물은 시퍼렇게 살아서 찰랑이고 몇무리인지 원앙이며 청둥오리 등 철새떼들이 부초처럼 둥둥떠서 유영하는 모습이 한산한 겨울풍경속에서 크게 두르러지지 않는다. 골짜기의 막자지까지 차를 몰고가 온통 하얀 눈밭에서부터 산행을 시작했다. 아이들은 눈싸움에 흥미를 싣기 시작하고 어른들까지 동화되어 눈덩이를 뭉쳐본다.
잎이 무성하던 계절에는 침침하던 산길이, 나무와 덩굴들이 무수한 푸른꿈들을 떨구어 버리자 시계가 훤히 트인다 가끔은 속살이 다 드러나도록 자신을 비워내야 튼튼한 가지가 하늘과 더 가까워지나 보다. 산중턱을 올랐는데 늦게 출발한 탓인지 벌써 오후 세시가 넘었다. 하산을 염두에 두고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정상으로 향하는 길목 커다란 바위 옆에 움막이 눈에 띈다.
길다란 나뭇가지에 허술하게 비닐을 두른 그안에는 뜻밖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적막한 산중에서 여자혼자 일주일, 혹은 보름씩 기도를 드린다니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게는 놀라움이었다. 아이들도 두었지만 결혼에는 실패를 하고 “일체 자연의 신”을 믿기 때문에 육식은 철저히 금하고 화장이며 퍼머도 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가 요청을 하자 스스럼없이 움막안을 보여주는데 축축한 바위 위에 깔은 얇은 자리와 허름한 이불로 어떻게 추위를 이겨내는지 고단한 또 다른 삶의 방식에 연민의 정마저 느꼈다. 발길을 돌려 산을 내려 오면서도 천차만별의 살아가는 모습 중에서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내 생활에 감사함을 느껴본다.
진리는 평범한 곳에 있다지만(확연히 깨달은바는 아니지만) 나의 의식과 행동역시 그런 범주를 벗어나지 않고 크게 모나지 않게, 헛되이 욕심내지 않고, 자기 분수와 인간의 도리에 어굿나지 않는 평심속에서 내자신을 추스르며 지내고 싶다. 온산과 대치를 뒤덮었던 흰눈이 따뜻한 햇살에 녹아내려 자취도 없이 땅속으로 스러지듯이 시간도 이처럼 우리들 곁으로 시나브로 스며들어 새로운 달이 오고 또 계절이 바뀐다.
꽁꽁언 땅속에서도 노루발풀은 여전히 동그란잎에 푸른빛을 온전히 지키고 생강나무는 잠자리눈 같은 봉우리를 부풀리며 다가올 봄을 의연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계절의 한파와 맞물린 시국의 매운 취위속에서도 묵묵히 맞서는 저력과 희망의 봉우리를 늘 간직하고 새롭게 키워나가는 지혜를 인고의 허허로운 겨울 숲에서 배워보는 하루였다.
<정이품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