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전, 400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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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0     최동철
올해는 보은군의 지명이 '보은'으로 명명 된지 600년이 되는 해다. 조선 태종 16년(서기 1416년)에 '보령'이라 불리던 지명이 '보은'으로 개칭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보은군은 이를 기념해 현재의 시대상을 담은 타임캡슐을 천년 째 되는 400년 후에 개봉키로 하고 매설했다.

600년 전 한반도는 뜨거운 한 해였다. 당시 자료를 보면 표현할 수 없을 만치의 엄청난 가뭄과 기근이 심했다. 조선이 개국한 지 24년 째 되는 해였다. 1,2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손에 피를 많이 묻힌 임금 태종의 5월14일자 기록은 이랬다.

의정부·육조·대간으로 하여금 한재(旱災), 즉 가뭄으로 인하여 생기는 재앙을 구제하는 방책을 강구하여 아뢰게 했다. 신하들은 당일 백성을 편하게 할 일곱 가지의 일을 아뢨다. 죄수 사면, 미결 옥사 처리, 결원 노비를 대신 세우지 말 것, 혁파한 군현을 다시 세울 것, 장죄(杖罪)를 범하여 직첩을 회수한 자가 환급할 경우 과전 전부를 돌려줄 것, 명산대천에 소재관으로 하여금 정성껏 기도할 것 등이었다.

보은이란 지명은 결국 ‘가뭄’을 이겨내고자 하는 방책에서 비롯됐다. ‘천심(天心)은 곧 민심(民心)’이란 말마따나 백성들의 숙원을 해결함으로써 어려움을 이겨내고자 했다. 아마도 당시의 지역민들은 독립된 ‘보은현’을 염원했던 것이 자명하다.

어쨌거나 태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관제개혁과 유교 정치에 온 힘을 쏟았다. 조세, 토지, 지방 행정 제도를 정비해 국가재정을 안정시켜 나갔다.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척불숭유’ 정책도 폈다. 고려시대 대접받던 승려는 졸지에 천민으로 격하됐다.

특히 태종 때 생긴 서얼금고법은 소설 ‘홍길동전’에서 알 수 있듯 서자 차별규정으로 조선말기까지인 1894년까지 적용됐다. 정작 자신부터 왕비를 포함해 후궁이 20명으로 적자 4명, 공주 4명 외에 서자 8명, 서자녀 13명을 두었음에도 서자들의 관직 임용 자체를 제한했다.

각설하고, 보은군의 타임캡슐이 개봉될 400년 뒤인 2416년은 과연 어떤 세상일까. 영화 ‘무서운 시리즈’ 세 번째 작품 ‘화성에서 온 소녀’엔 그 때도 전쟁뿐이다. 2416년, 화성에 정착해 살던 이주민이 지구군의 침략으로 멸망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처럼 경천동지할 미래 세상에 정녕 보은군이 그 시대에도 존속하고 있을까. 의구심이 생긴다. 자고나면 온 세상을 초토화 시킨다는 핵전쟁이 곧 날 듯 하고, 환경오염에, 이상기후에, 각종 질병, 슈퍼 박테리아가 기승을 부린다.

이 와중에 출산율마저 저조하다. 신세대는 자신들의 성취감이나 만족감이 출산의 의무감보다 강하기 때문에 출산에 대해 자긍심을 갖지 않는다. 보은군 인구는 현재 3만4천여 명이다. 젊은이보다 노인이 훨씬 많다.

대처로 떠난 젊은이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자, ‘보은’의 미래 대책은 과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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