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살다 : 山居 / 쌍명재 이인로

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96】

2016-06-30     장희구 (시조시인 문학평론가)
시인 묵객들은 자연에 취해 살면서 사는 곳이 어디인지 깜박했던 것 같다. 독서에 몰입하다 보면, 시작(詩作)에 정열을 쏟다보면 위치와 사정을 잠시 잊어버리는 수가 있다.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직장의 일에 충실하다 보면, 작품 감상이나 놀이문화에 취하다 보면 이런 현상을 경험한다. 시인이 산속 자연에 취하면서 독서삼매에 흠뻑 빠졌다가 두견새가 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산에서 살고 있음을 느껴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山居(산거) / 쌍명재 이인로
이미 봄은 지났건만 꽃의 모습 자랑하고
하늘은 맑건만은 골짜기는 그늘졌네
두견새 대낮에 우네요, 알겠어요 내 사는 곳.
春去花猶在 天晴谷自陰
춘거화유재 천청곡자음
杜鵑啼白晝 始覺卜居深
두견제백주 시각복거심

산에서 살다(山居)로 번역해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쌍명재(雙明齋) 이인로(李仁老:1152∼1220)로 고려 후기의 문신이다. 1170년 그의 나이 19세 때에 정중부의 난을 피해 승려가 되기도 했다. 환속하여 문극겸의 천거로 한림원에 보직된다. 이름난 선비 오세재·임춘 등과 죽림고회를 만들었는데 죽림7현(竹林七賢)을 흠모했던 문학 모임이었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봄은 지났지만 꽃은 여전히 피어있고, 하늘은 맑아도 골짜기는 그늘졌네. 두견새가 대낮에 울어대니, 비로소 사는 곳이 깊음을 알겠구나]라는 시상이다.
쌍명재의 문학세계는 선명한 회화성을 통하여 탈속의 경지를 모색했으며, [문]은 한유의 고문을 따랐고 [시]는 소식을 숭상했다. 최초의 시화집인 [파한집]을 저술하여 한국문학사에 본격적인 비평문학의 길을 열었다. 이 책에는 자작시가 들어 있는데, 자작시만 들어 있는 것도 13화에 이르고 있다.
시인은 깊은 산속에서 살고 있다. 봄 내음 깊숙이 파고드는 산 속에서는 늦게까지 꽃이 피었던 모양이다. 나무가 우거져 맑은 날씨이지만, 골짜기는 그늘져 있고, 밤에 울어야 할 두견새가 대낮에도 구슬프게 울고 있으니 인적이 드물어 깊은 산 중임을 비로소 알겠다는 내용을 담는다.
화자의 입을 빌은 이 시의 주제는 유유자적한 삶의 태도라고 하겠다. 한가한 산 속에서 벗 삼을 만한 것이 있다면 포근한 자연! 오직 그것뿐이다. 그윽한 산 속에서 묻혀 살아가는 화자의 적적하고 고요한 심정을 나타냈으며, 그런 곳이라면 학문을 깊이 하며, 시문에 푹 빠지는 작가적 태도를 찾는다.
【한자와 어구】
春去: 봄이 가다. 花猶在: 꽃은 오히려 있다. 天晴: 하늘이 개다. 谷自陰: 계곡은 스스로 그늘이 졌다. // 杜鵑啼: 두견새가 운다. 白晝: 대낮. 흔히 대낮을 [백주]라고 한다. 始覺: 비로소 깨닫다. 卜居深: 사는 곳이 깊다. 사는 곳이 깊은 줄을 알다. [卜]은 길흉을 알다는 뜻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