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가꿔 이 흰 머리털 나게 했던가 : 臨水 / 무의자 진각혜심
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81】
2016-02-18 장희구 (시조시인 문학평론가)
우연히 맑게 고인 맑은 물속 들여다보니
눈과 서리 머리 가득 나 몰래 가득 찼네
훌훌 턴 근심걱정인데 흰 머리 누가 가뀠나.
偶爾來臨止水淸 滿頭霜雪使人驚
우이래임지수청 만두상설사인경
不憂世事兼身事 誰得栽培白髮生
불우세사겸신사 수득재배백발생
누가 가꿔 이 흰 머리털 나게 했던가(臨水)로 번역해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무의자(無倚子) 진각혜심(眞覺慧諶:1178∼1234)으로 고려의 고승이다.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에 들어갔으나 어머니 병환으로 고향에 돌아와 불경을 공부했다. 지눌이 입적하자 왕명에 의해 수선사에 들어가 조계종 2세가 되어 불심을 전한 선사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우연히 와서 맑게 고인 물을 들여다보다가, 머리에 가득한 눈과 서리를 보고 깜짝 놀랐네. 세상일도 내 일도 근심하지 않았건만, 누가 가꿔 이 흰 머리털을 나게 했던가]라는 시상이다.
이 시제는 [물가에서]로 번역된다. 무의자 대선사의 불심을 기리는 찬시 한 수가 있다. [임 떠난 지 팔백여년 남은 불향 피워 물고, 이 땅에 환한 촛불 온 누리 밝히시니. 화순골 태생지에서 피어나는 연화랍니다] 자신의 머리가 희어짐을 느낀 날에 허탈함에 젖어 보았던 경험이 있을게다. 혜심에게도 어느 날 문득 그런 느낌을 받았음을 본다.
스님이란 본디 세상사 근심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늙지 않을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세월’이란 사람을 위해 가만히 기다려주지 않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머리에까지 눈과 서리를 재배하고 말았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며 [조견경백발(照鏡見白髮)]을 쓴 장구령(張九齡)이나, [백발유공도불비(白髮惟公道不悲)]라 ‘오는 백발도 슬퍼할 기력이 없다’고 탄식했던 삿갓의 표현에서 보듯이 누구나 시대를 막론하고 세월 앞에선 무기력해졌으니. 거울 볼 틈도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주는 또 다른 교훈이겠다.
【한자와 어구】
偶: 우연히. 爾來臨: 여기에 오다. 止水淸: 고인 물을 들여다 보다. 滿頭: 머리에 가득 차다. 霜雪: 서리와 눈. 使人驚: 놀라다. 곧 머리가 본인을 놀라게 하다는 사역형. 不憂: 근심하지 않다. 世事兼身事: 세상의 일과 자신의 일. [兼]은 연사임. 誰得: 누가. 栽培: 재배하다. 白髮生: 백발이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