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2015-12-03 이 장 열 (사)한국전통문화진흥원 원장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금색 들판을 뒤덮고 있던 곡식들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범인마저 오리무중이다.
여보소! 농부에게 물어봐도 시치미를 뗀다. 파장(罷場)인 가을 태양도 일없이 중천을 떠돌더니 노을인사도 없이 가 버렸다. 이윽고 산사(山寺)에 밤이 찾아왔다.
똑,똑,똑
누가 왔나?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심산 산사를 찾아든 이는 우사(雨師)였다.
그는 낮에만 해도 왁자지껄 떠들어대던 낙엽들을 잠재우고 도둑같이 이 밤에 찾아들었다.
할 일없는 산개(山犬)도 몸을 말아 주둥이를 박고 자고 있다.
우사(雨師)는 옷이 축 처져 있다. 아마 꽤 먼 길을 걸어 온 모양이다. 무척 피곤해하며 처마 아래 서서 한숨을 쉰다.
집안에는 누가 켜 놓았는지 조그만 호롱불만 깜박이며 희끄무레하게 방안을 비춰주고 있을 뿐 인기척이 없다.
그는 오늘은 비록 초라한 불청객의 몸이지만 전에는 참 잘 나가는 존재였다.
봄에는 만물을 소생시키는 손님이라 해서 사람들은 얼굴주름을 펴고 반겼다.
그가 보슬보슬 쏟아주는 빗물에 새싹들은 살랑살랑 춤을 추면서 올라와 노래를 불렀으며 긴 겨울을 참고 견뎌온 나무들도 기지개를 펴고 일할 준비들을 시작하였다.
하늘과 땅만 보며 사는 농부들은 가뭄 끝에 찾아온 그를 보고 모두 함성을 지르며 ‘비마중’도 해 주었다.
환대받는 그도 우쭐하며 정말 신이 났었지.
더욱이 식물 성장기에 물이 많이 필요한 여름철에는 번개불칼과 우르르 쾅쾅 뇌성의 도움을 받아 온 대지에 양동이로 들어부어 축복해 주었지. 농수로에는 물이 넘쳐났고 계곡물도 소리를 지르며 생의 노래를 불렀지.
참 좋은 시절이었어.
그러나 금년 여름에는 사정이 좀 달라졌다.
가뭄이 길어지면서 하천은 가던 길을 멈추었다.
저수지는 수위를 반 이하로 줄였고 아예 바닥을 들어낸 곳도 태반이었다.
바다같이 넓은 비룡저수지 진흙바닥에서는 미처 도망가지 못한 말조개가 목을 움켜잡고 말라죽어갔다.
사람들은 하늘을 보며 원망했다.
그러다가 곡식이 익어갈 무렵에는 농부들은 또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다행히 금년 농사는 대풍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풍년축제에 들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지금은 괜찮지만 내년 농사가 걱정”이라는 한 선지자(?)가 있었다. 아무도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저 부어라 마셔라, 팔걸이 축배, “내 나이가 어때서?” 등 노래 부르느라 난리들이었다.
우사(雨師)는 바로 그 선지자의 걱정 때문에 늦게나마 찾아온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반기지도 감사하지도 않았다.
만추(晩秋)에 온 불청객은 초라한 꼴을 하고 산사 처마 밑에 서서 떨고 있다.
귀뚜리도 울음소리를 멈추고 더듬이를 돌리며 그의 행동만 주시하고 있다. 갈 곳 없는 그는 미안해서 더 이상 문을 노크하지 않을 것이다. 산승(山僧)이 문을 열어주지 않는 한 그렇게 서서 온밤을 지새다 새벽이 오면 돌아갈 것이다.
산승(山僧)은 내다보지 않고 우사(雨師)는 처마 밑에서 떨고 있다.
방안에는 호롱불 하나만 켜져 있다.
이렇게 그들은 각각 긴긴 만추(晩秋)의 밤을 새하얗게 지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