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그림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 訪金居士野居 / 삼봉 정도전

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22】

2014-11-20     장 희 구(시조시인 문학평론가 )
문사철(文史哲)이라고 했다. 문학과 역사와 철학은 문학적 학문적으로 서로 넘나든다는 뜻이다. 그래서 정객들은 모두가 시문과 역사에 능통했다. 동지를 만나도, 친지를 만나도, 대화가 통하는 여인을 만나도 거침없이 시문을 수창(酬唱)했다. 조선개국의 일등공신인 정객(政客) 한 사람이었지만 한국화 한 폭을 그리듯이 문학적 상상력으로 일궈 낸 시 한 편을 만난다. 마지막 결구에서 시인의 상상력을 만나는 멋진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訪金居士野居(방김거사야거) /삼봉 정도전
가을 구름 몽실 몽실 사방 산은 고적한데
소리 없이 지는 잎들 온 땅 가득 붉었어라
말 세워 돌아갈 길 묻노니, 그림 속이 내 몸인가.
秋陰漠漠四山空 落葉無聲滿地紅
추음막막사산공 락엽무성만지홍
立馬溪橋問歸路 不知身在?圖中
입마계교문귀로 불지신재화도중

몸이 그림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訪金居士野居)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저자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1342~1398)은 조선 개국의 핵심 주역으로 고려 말기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새 왕조를 개창했다. 제도의 개혁과 정비를 통해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튼튼하게 다져놓았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가을 구름 몽실몽실 사방 산은 고적한데 / 소리 없이 지는 잎들 온 땅 가득 붉어라 /시내 다리에서 말을 세우고 돌아갈 길 묻노라니 / 이 내 몸이 그림 속에 있는 것은 아닐런지]라는 시상이다.
김거사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전라도 나주 인근에 사는 어떤 식자로 추정된다. 삼봉이 34~36세 시절이다. 이인임을 필두로 한 친원파의 세력에 눌려 전라도 나주의 회진현 거평부곡에 속한 소재동(消災洞)에서 3년간 귀양살이를 했다고 전하는데, 그 때 쓴 시 28수가 [금남잡영(錦南雜詠)]에 묶여 있다.
시인은 김 거사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이다. 어느덧 시냇가 다리 앞에 와 섰다. 올 때에는 집을 찾느라 보지 못한 늦가을 오후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쪽빛 하늘에는 비늘구름이 몽실몽실 떠 있고 사이의 산은 인적이 없이 텅 빈 듯 고요하다. 바람 없는 적막 속에 한 잎 두 잎 소리 없이 낙엽은 지고 있다. [아, 어느새 단풍이 수북이 쌓인 만추의 한 가운데에 내가 오똑이 서 있구나]하는 탄성을 자아내게 된다.
화자가 한 폭의 그림 속에 홀린 듯이 말을 타고 들어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러고 보면 ‘김 거사는 화중지인(畵中之人)이 아닌가!’라고도 하면서…
【한자와 어구】
秋陰: 가을의 구름 낀 하늘. 漠漠: 몽실몽실하다. 空: 한적하다, 고적하다. 落葉: 낙엽. 無聲: 소리 없다. 滿地紅: 온 땅이 가득 붉다. 立馬: 달리던 말을 세우다. 溪橋: 시내 다리. 問歸路: 돌아갈 길을 묻다. 不知: 알지 못하겠네. 身在: 몸이 ~에 있다. ?圖中: 그림 가운데.